대가리부터 뜯는 전어구이, 가을을 통째로 맛보다
초보는 낙지젓, 고수는 밴댕이젓
젊은층에겐 뽕잎 넣은 찐빵 인기
[일일오끼] 전북 부안

변산반도를 품은 전북 부안은 서해안에서도 알아주는 맛의 고장이다. 이 땅엔 진정 밥도둑이 천지로 널려 있다. 9월부터는 전어가 제철을 맞는다. 전어 굽는 냄새가 식당마다 코를 자극한다. 염전을 가까이 둔 곰소항에는 젓갈 반찬이 열 개씩 깔리는 식당이 허다하다. 속이 허할 땐 백합죽, 입맛이 없을 땐 생선조림, 디저트는 뽕잎 넣은 찐빵으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부안에 다녀왔다. 정신없이 숟가락질하다 돌아왔다.
고소하고 진한 가을 진미

전어는 ‘가을’이라는 단서를 붙일 때 완전해진다. 여름 전어는 살이 물러 맛이 덜하다. 찬바람 불어 월동 준비하는 계절에야 비로소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9, 10월이 제철이다.

부안 사람은 전어 횟집 몇 개쯤은 줄줄이 꿰고 산단다. 궁항 인근의 ‘신용횟집’처럼 직접 고깃배를 부리는 횟집일수록 대접받는다. 싱싱한 전어를 맛볼 수 있어서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전어회 정식(4인분 10만원)을 주문했다. 마침 아침에 들어온 전어가 있다고 했다. 어느새 전어구이·회무침·전어회가 상을 가득 채웠다.
28년 경력의 김부월(64) 사장이 말했다. “가을 전어는 딴 거 없어. 싱싱한 놈 잡어다 천일염 솔솔 뿌려서 구우면 돼야. 고수들은 통째로 씹어 먹지.”
전어에도 먹는 순서가 있다. 무조건 전어구이를 마지막에 먹는다. 워낙 향이 진하고 맛이 깊어 구이부터 먹으면 다른 음식에 손을 못 댄단다. 머리부터 꼭꼭 씹었다. 고소한 뒷맛이 계속 입맛을 당겼다. 가을을 통째로 씹는 맛이었다.
사라진 백합, 살아남은 백합죽



백합은 사라졌지만, 백합죽은 사라지지 않았다. 원조집으로 통하는 행안면 ‘계화회관’. 계화도 출신의 이화자(76) 할머니가 39년째 백합죽(1만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잘게 다진 백합으로 쑨 죽 한 그릇. 참기름 간에 김과 깻가루 고명이 전부지만, 깊은 맛이 우러났다. 최국서(79) 할아버지는 아내의 솜씨가 여전히 신기한 모양이었다. “안사람은 슥 잡아만 봐도 상한 놈을 찾아. 반평생 백합만 만졌거든.”
곰삭힌 세월의 맛

곰소항 앞에 대규모 젓갈 단지가 조성돼 있다. 젓갈 집만 30여 개에 이른다. 덕분에 곰소항은 김장을 앞둔 살림꾼에게 꼭 가봐야 할 성지로 통한다. 새우젓·가리비젓 등 가게마다 20~30가지 젓갈을 판다. 500g에 1만5000원 선이다. 시식은 기본. ‘명품종가집젓갈’처럼 막걸리를 공짜로 퍼주는 젓갈 집도 더러 있다. 막걸리와 젓갈의 찰떡궁합 앞에 장사가 없다는 걸 젓갈 집 아낙네들은 알고 있다. 장사 수완이 정겹다.
곰소항 주변으로 젓갈 전문 식당이 줄지어 있다. 20년 전통의 ‘자매식당’도 그중 하나다. 백반(1만2000원) 하나면 젓갈 열 가지가 먹음직스럽게 담겨 나온다. 바지락젓·창난젓·꼴뚜기젓 등 골라 먹는 재미가 크다.
김영환(60) 사장은 “젓갈 초보자는 청어알젓, ‘막걸리파’는 청양고추를 크게 썰어 넣은 밴댕이젓을 공략한다”고 말한다. 맛과 향은 달라도 하나같은 밥도둑이다.
곰소항의 대표 젓갈 중엔 갈치속젓도 있다. 갈치의 싱싱한 내장과 아가미를 모아 담근다. 숙성 기간은 대략 1년에서 2년 6개월. 따뜻한 흰 밥에 갈치속젓을 쓱쓱 비비자, 자연히 침이 고였다. 짭조름하고 깊은 향이었다.
풀치를 아시나요

부안에서 풀치는 단순히 어린 갈치가 아니다. 지푸라기로 하나하나 엮어 말린 갈치를 뜻한다. 그 시절 추억의 먹거리요, 척박했던 삶의 흔적이다.

요즘처럼 해가 좋을 때는 하루에서 이틀 정도 말리면 먹기 좋은 상태가 된다. 7~8마리씩 줄줄이 매달아 파는데 한 줄에 5000~6000원을 받는다.
곰소항 인근 식당 ‘개미궁’에 들러 풀치 백반(2인분 2만원)을 시켰다. 큼지막한 무가 깔린 빨간 조림이 나왔다. 풀치는 조림으로 먹는 게 일반적이란다. 생긴 건 일반 갈치조림과 다르지 않다. “다들 ‘갈치잖아’ 하며 실망하다, 맛을 보고 놀란다. 식감이 전혀 다르다”라고 김경숙 사장(59)이 말했다. 해풍을 맞으며 꼬박 이틀을 말린 풀치. 과연 쫄깃쫄깃했다.
뽕잎 청국장과 오디 찐빵


부안에도 전국구 인스타그램 맛집이 있다. 곰소염전 앞 ‘슬지제빵소’다. 생크림찐빵(1개 3500원)은 주말 하루 500개 가까이 팔린다. 오색 찐빵(5개 6000원)은 뽕잎·오디·단호박·흑미 등을 이용해 빵마다 색도 향도 다르다. 오디를 앙증맞게 올린 음료수 ‘오디봉봉’(6000원)도 인증 사진을 부른다. 읍내 ‘슬지네찐빵’의 네 자녀가 이태 전 문을 열었다. 김슬지(35) 대표는 말한다. “90%는 외지인 손님이에요. 저희도 미처 몰랐어요. 부안에서 나고 자란 열매가 이렇게 맛있고 예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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