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목욕탕에 몰래 들어온 듯 겁이 났다
[오마이뉴스 글:우세린, 편집:최은경]
마그마 수증기 덕에 자연온천이 발달한 미국 캘리포니아.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신성시하고, 백인들은 호텔과 리조트를 세운 이곳의 역사를 전현직 기자인 우세린 작가 부부가 소개한다. <편집자말>
거대한 뱀들이 인간이 사는 원판형 중간계를 떠받치고 있다. 독수리들은 두 날개를 펴 천상계를 이고 있다. 그곳은 태양과 달, 북극성 등 강력한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지하세계는 추악하게 생긴 생명체 누나시스(Nunasis)가 우글거린다. 누나시스는 어두워지면 지상계로 슬며시 올라와 인간을 겁주고 병들게 한다. 그럴 때면 올빼미들이 비상해 중간계를 살피며 인간의 병을 치유한다. 아메리카 원주민 추마시(Chumash) 부족은 세상이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믿었다.
지난 5월 우리 부부는 서핑 동호회원인 오모씨 부부와 함께 추마시의 옛 땅,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세스피 자연보호구역(Sespe Wilderness)을 찾았다. 그곳 세스피 리버 트레일(River Trail)과 존스톤 릿지 트레일(Johnstone Ridge Trail) 52km를 1박 2일 걸었다.
세스피 보호구역은 캘리포니아 벤투라 카운티 오하이(ojai) 북쪽으로 로스 파드레스 국유림(Los Padres National Park)에 속해 있다. 세스피는 추마시 언어로 'Cepsey', 'Sek-pe'라고 불리는데, 무릎 앞 뼈인 슬개골(Kneecap)을 뜻한다. 인간이 슬개골이 없다고 걷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인대의 지렛대 역할을 하는 밤알만 한 슬개골이 없으면 종아리뼈를 쉽게 들어 올릴 수 없다. 기동성의 축이다. 세스피는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캘리포니아 남부에 툭 솟아 있다. 이곳에서 자연 생태계 보존의 견인 역할을 해 이름이 이렇게 붙여진 것 아닐까?
세스피 보호구역은 면적 889㎢로 지리산 국립공원(438.9㎢) 배 크기다. 낚시꾼과 사냥꾼이 많이 찾는 아구아 블란카 트레일(Agua Blanca Trail), 멸종위기 조류인 대형 독수리 콘도르(Condor)를 관찰할 수 있는 앨더 크릭 트레일(Alder Creek Trail) 등 18개 트레일 219km 구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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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핑 동호회원인 오 씨 부부와 함께 세스피 강을 건너고 있다. |
| ⓒ 우세린 |
LA에서 오전 8시 출발해 157km를 달려 트레일 출발점인 피에드라 블랑카 트레일헤드(Piedra Blanca Trailhead)에 10시쯤 도착했다. 일반도로를 달리다 산악지대로 들어서면 울타리 안에서 말이 풀을 뜯는 목가적 풍경이 펼쳐진다. 작은 호수가 나오고 멀리 너럭바위가 산 중턱에 누워 있으면 맞게 온 것이다. 부지런한 하이커들은 이미 주차를 하고 트레일에 오른 뒤였다.
얼렁뚱땅 하이커의 첫 번째 실수. 뭔가 기분이 찜찜하더라니. 국유림 입장권인 어드벤처 패스(Adventure Pass)를 사서 오지 않았던 것이다. 남부 캘리포니아 로스 파드레스 국유림과 엔젤레스 국유림(Angeles National Forest), 클리브랜드 국유림(Cleveland National Forest), 샌버나디노 국유림(San Bernardino National Forest)에서는 산림청이 발급하는 어드벤처 패스가 있어야 국유림 입장과 차량 주차를 할 수 있다.
패스를 사러 다시 도시로 나가야 하나? 당황하고 있는 사이, 동행한 오씨 부부가 하이킹을 이미 끝내고 짐 정리를 하는 여성 하이커에게 다가가 남는 패스를 현금을 주고 샀다. 휴~. 패스는 아웃도어 가게 빅파이브(Big5)나 일부 낚시도구점에서 1일권 5달러, 1년권 30달러에 살 수 있다.
멸종위기 종 '콘도르'의 땅 세스피 보호구역
걷기는 어렵지 않다. 고도 936m에서 출발해 중간지점인 고도 764m까지 내려가다 다시 목적지 고도 947m까지 천천히 올라간다. 무더운 여름을 피해 봄, 가을에 산행하면 좋다. 우리가 간 날은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하늘거리는 한복 치마 같은 노오란 양귀비 꽃 '트리 파피(Tree poppie)', 주홍빛 호리병 모양의 꽃이 주렁주렁 달린 '스칼렛 버그러(Scarlet bugler)', 길다란 꽃대에 보라색 꽃이 촘촘히 달린 '루핀(Lupines)'이 제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척박한 사암지대에서 보는 꽃구경은 그야말로 꿀재미다. 큰 배낭을 매고 혼자 걷던 샌타바바라 출신 여성 하이커 세라가 나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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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부터 야생화 스칼렛 버그러, 루핀, 트리 파파, 블루딕스. |
| ⓒ 우세린 |
세스피는 한국 천성산 도롱뇽처럼 환경보호운동으로 처음 조명을 받았다. 주인공은 대머리에 날개 밑 흰 점이 있는 대형 독수리 콘도르다. 미국은 1950년대 들어 자동차와 기차, 비행기 등 대중 교통 발달로 레저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한다. 자연스럽게 산악 오토바이, 캠핑족들이 깊은 산까지 들어와 바비큐 파티를 하고 술판을 벌였다. 사냥꾼은 납탄으로 짐승을 잡고 카우보이들은 소와 말 등 가축을 끌고 와 풀을 먹였다.
피해는 고스란히 야생동물 몫이었다. 콘도르는 납탄에 맞아 죽은 동물 사체를 먹다 중금속에 중독됐다. 살충제에 노출됐고 가축이 옮겨온 질병에 병들었다. 서식지도 점차 줄었다. 결국 원주민들의 신화에 등장하는 콘도르는 백 마리 이하로 급감했다.
먼저 1947년 콘도르 보호를 위해 214㎢ 면적이 세스피 보호구역(Sespe Sanctuary)으로 지정된다. 하지만 환경파괴가 계속됐다. 환경단체 세스피자연보호유지위원회(Keep the Sespe Wild Committee)가 나서 더 넓은 지역을 자연보호구역으로 만들기 위해 연방 상하원의원을 압박했다. 법안을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결국 41대 대통령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의 서명으로 1992년 이곳이 자연보호구역이 된다. 이때 세스피 계곡 50.6km도 함께 지정됐다.
캘리포니아에서 댐이 없는 보기 드문 자연 그대로인 강으로 남아있다. <LA 타임스>는 1994년 12월 이곳을 '영원함이 보호된 지역(Protected Forever)'이라고 표현했다. 현재 캘리포니아에 서식하는 콘도르 172마리, 그 중 80여마리가 이곳에 날고 있다.
2시간 30분쯤 걸어 출발지에서 7km 떨어진 베어 크릭 트레일 캠프(Bear Creek Trail Camp)에 도착했다. 하이커들은 보통 이곳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쉰 뒤 윌렛 온천에 가기도 한다. 낮에는 수영을 하고, 밤에는 별을 본다. 우리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앉아 도시락을 까먹었다. 꽃 이름을 알려줬던 하이커 세라는 뒤따라 도착해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물에 첨벙 뛰어들었다.
윌렛 온천으로 다시 향하는 길. 70L 용량 대형 배낭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오씨 부부는 4인용짜리 중형 텐트까지 짊어지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해가 머리와 어깨를 달구기 시작했다. 발에 물집이 잡혀왔다. 얼렁뚱땅 하이커들은 9km를 더 걸어 오후 5시 30분쯤 윌렛 캠핑장(Willet Camp)에 도착했다. 최종 목적지인 세스피 온천까지 중간 지점이다. LA에서 얼려온 고추장 양념 불고기를 꺼내 구웠다. 당구장 짜장면, PC방 컵라면에 이어, 캠핑장 바비큐는 일종의 의식이다.
불을 피울 때는 자연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기 위해 돌로 둥그렇게 쌓아놓은 파이어링(Fire Ring)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땔감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불을 피우려면 '불사용 허가증(California Fire Permit)'이 있어야 한다. 비영리단체인 캘리포니아 화재방지협회 홈페이지(www.preventwildfireca.org)에 들어가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다. 위반하면 우리 돈 1100만원 상당의 벌금과 6개월 실형을 살 수 있다.
깊은 산 속에 설치된 고무 튜브
이른 저녁을 먹고 윌렛 온천으로 향했다. 텐트에서 언덕으로 600m쯤 올라갔다. 막다른 길, 거대한 암벽이 가까이 오자 유황 냄새가 서서히 났다. 도착한 곳에는 검정 대형 고무 튜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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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윌렛 온천. 수풀 속에 덩그러니 고무 튜브가 있다. |
| ⓒ 우세린 |
오하이에 거주한다는 히스패닉계 남성 론은 스테인리스 컵에 콜라와 위스키, 얼음을 띄운 칵테일을 마시고 있었다. 산속에서 웬 얼음? 놀란 눈으로 술을 빤히 보자 한 모금 마셔보라며 컵째 줬다. 달콤하며 찌릿한 것이, 빨리 하산하고 싶었다.
"오하이에서 나귀와 말에 풀을 먹이러 산에 온 거야. 말에 음료와 술을 넣은 아이스박스를 매달고 산 속에 왔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이곳은 20년 전쯤 오하이에 사는 남자가 헬리콥터를 이용해 튜브를 설치했어. 그때부터 이곳이 확 바뀌었지."
옆에 있던 하이커는 온천을 '신성한 물(Holy Water)'이라며 손으로 떠서 어깨에 흘려 보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하이커 세라가 뒤따라 올라왔다. 세라는 이곳이 벌써 4번째라고 했다. 예전에는 온천 파이프 끝에 그물망이 없어 탕에 허연 부유물이 많았다고 한다.
"여기까지 걸어오기 힘들지만 여기 오면 진짜 캘리포니아를 만끽할 수 있어. 개발되기 전 그대로의 모습 말이야. 초록빛 온천을 봐봐.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야. 여기를 지나 세스피 온천 가까이 가면 '뿔 큰 양'인 빅혼쉽(Big Horn Sheep) 무리를 볼 수 있어. 자세히 보면 플라스틱 장치를 달고 있을 거야. 개체수가 줄어 과학자들이 관찰하기 위해 설치한 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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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스피 온천 가는 길. 카펫처럼 깔린 풀 위에 누웠다. |
| ⓒ 우세린 |
새벽 길에서 시원의 세계를 보다
다음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간밤에 정체 모를 짐승이 텐트 가까이 와 잠도 설쳤다. 짐승 숨소리가 귓가에서 생생히 들렸다. 휴대전화 배터리도 다 떨어져 전화기를 껐다 켰다 반복하며 GPS로 트레일 위치를 확인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종종 발걸음은 덤불 속으로 이어졌다. 몇 번이나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대처 캠프그라운드에서는 자고 있던 캠핑족을 깨우고 말았다. 우리가 들고 다니던 광선 같은 손전등에 놀라 밖으로 나온 것이다. 예의가 없다며 우리를 보며 정색을 했다.
대처 캠프그라운드에서 세스피 온천까지 9km. 트레일에는 이정표가 거의 없다. 사람 발자국과 풀이 누운 자리를 보고 걸어야 한다. 말똥도 기가 막힌 길 찾기 단서다. 길을 걷다 뭔가 이상하다면 두세 번 확인해야 한다. 잊을 만하면 실종사고가 나는 곳이다. 중간중간 GPS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다.
인간이여, 너희들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 이마 아래 선명한 두 개의 불순물 / 눈동자라 불리는 작고 동그란 요물단지로
한 켠에는 수백 미터 가량 융기한 돌무더기가 있다. 신생대 2기인 기원전 4000만년 전 에오세(Eocene Epoch)와 2400만년 전인 신생대 3기 올리고세(Oligocene Epoch) 사이에 형성된 사암지층이다. 수천만 년 동안 풍화작용으로 암벽은 붉은색, 밤색, 녹색, 핑크빛이 돌았다. 사암은 단단해 침식이 되면 쩍쩍 갈라지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뜨거운 온천 수증기가 품은 고대 자연 속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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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 암벽 틈으로 온천수가 폭포처럼 흘러 내린다. |
| ⓒ 우세린 |
서너 시간쯤 걷자 계곡물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나무 곁에 은신해 있는 캠핑족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다 왔구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야자수 군락이 보인다. 멀리 황톳빛 암벽 주변에서 수증기가 뭉게뭉게 피어 오른다. 오른편에는 잿빛 화강암을 따라 온천수가 계단처럼 휘어 내려온다. 세상에 용이 산다면 저 곳이다. 영생할 수 있는 약초가 저 끝에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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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른쪽 물이 온천수. 왼쪽 지류가 차가운 물이다. |
| ⓒ 우세린 |
마시는 물도 버리고 휴대용 정수기만 들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계곡에서도 등산화를 벗지 않고 물을 건넜다. 저벅저벅 걷는 걸음마다 등산화는 물을 토해냈다. 골반은 덜그럭 덜그럭, 쉬는 시간이 잦아졌다. 함께 걷던 오씨 부부가 한 시간가량 앞서 나가자, 에라 모르겠다, 조바심마저 사라졌다.
오후 6시쯤 꾸역꾸역 출발점에 도착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중간지점에서 온천까지 11km를 걷고, 다시 출발점까지 24km를 걸었다. 도합 35km, 14시간 대장정이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차로 향했다. 그런데! 앞서 갔던 부부가 없다. 짐 내린 흔적도 없다. 주위에는 쉴 만한 식당이나 커피숍도 없었다. 조난을 당한 건가? 해는 서서히 숨기 시작했다. 배낭을 던져 놓고 주변을 살폈다. 그때쯤 윌렛 온천에서 만났던 카우보이가 말과 나귀 20여 마리를 끌고 나타났다.
"헤이! 잘 있었어? 너희 친구들 봤어. 저기 뒤에 오고 있어."
오씨 부부는 목적지를 지나 길을 잃고 통제된 다른 트레일로 갔던 것이다. 해가 지려고 하자 남편은 놀라 무거운 배낭을 메고 뛰다시피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때 마침 귀가하던 카우보이 일행을 만났던 것이다. 모두들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떨어져 연락할 길이 없었다. 음식도 남지 않았다. 실종이 현실이 되는 순간. 추마시 부족의 중간계를 보살피던 올빼미가 날아올랐던 모양이다.
** 그동안 <어서 오너라, 벗고 놀자>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은 찜통더위라고 들었습니다. 온천 글이 더욱 덥게 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가을이 오면 시즌2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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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세명대학교 저널리즘 스쿨 <단비뉴스>, 개인 브런치에 중복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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