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46) 정약용의 '다산문선' 사약의 공포를 견디며 세상을 일깨워

2014. 7. 2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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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으로는 '다산산문선'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상 박석무 옮김)'가 있다. 시로는 '다산시선(송재소 옮김)'이 생애순으로 쓴 시들로 실려 있다. 평전으로는 금장태의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과 함께 정민의 '다산의 재발견'을 추천하고 싶다. 한승원의 '다산1·2'는 다산의 삶을 소설로 썼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정조가 승하한 1800년 6월, 그의 나이 39살 때 인생의 중대 전환점을 맞이한다. 그 이전에는 정조의 총애를 받은 충직한 신하였다면 그 후에는 '실천적 사상가이자 자주정신이 강한 문장가, 냉철한 현실개혁가'로 자리매김됐다. 그는 18년 6개월 동안 유배지에서 '실천적 지식인'으로 거듭났고 집에 돌아와 다시 18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배 원인(遠因)은 그가 23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784년 다산과 다산 일가에 크나큰 먹구름을 드리우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인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는 '사건'이다.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깊어지자 반대파에서는 서학을 신봉한다는 트집을 잡아 다산을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이에 그는 1797년 6월에 사직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른바 '자명소'로 불리는 '변방사동부승지소'다.

이 상소문에서 그는 자신과 천주교의 관계를 소상히 밝혔다. 처음에는 천주교를 마음으로 좋아했지만 성균관에 들어온 이후로는 천주교를 원수처럼 미워했다고 말했다.

"갑진년(1784년, 23세) 4월 보름날 큰형수의 제사를 지내고 우리 형제가 이덕조(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물결을 따라 내려오다가 배 안에서 천지조화의 시초와 육체와 정신, 죽음과 삶의 이치에 대해 듣고 황홀하고 놀랐는데, 마치 은하수의 끝없음과 같았다. 서울에 온 후 덕조로부터 '천주실의' 등 여러 권의 책을 보고 혼연히 그쪽으로 기울었다. 정미년(1787년) 이후 4~5년 동안은 서교에 마음을 기울였다. 그러나 신해년(1791년) 이래로 나라에서 서교를 엄중히 금지하자 마음을 끊었다." 이렇게 밝혔음에도 천주교와의 만남으로 인해 결국 다산 일가는 풍비박산 났다.

다산을 불행으로 몰아넣은 또 하나의 원인은 서용보와의 악연이다. 33세 때 다산은 경기 암행어사로 활동했는데 이때 평생 그를 옥죄이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서용보와 관련된 일처리다.

"서정승(사암연보에는 서용보)의 집 사람이 향교의 땅을 정승의 집에 바쳐 묘지로 삼고자 꾀를 부려 '땅이 불길하다'고 속이고 고을 유림들을 협박해 향교 명륜당을 헐어버렸다. 내가 이 사실을 탐지해내고 곧바로 체포해 처벌했다. 또 관찰사 서용보가 강가에 인접한 7개 읍에 관청 곡식을 팔아서 돈을 만드는데 너무 비싸게 팔고 있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했는데 다산이 그랬다. 이로 인해 처분을 받은 서용보는 다산을 일생 원망하면서 모살코자 했다. 서용보는 노론 벽파 세력가 출신으로, 1801년 신유사옥 당시 우의정이었다. 1801년 2월 27일 유배길에 오른 후, 1802년 겨울에 다산의 해배특명이 내려졌지만 그의 해배를 가로막은 이가 서용보였다. 서용보로 인해 다산은 16년을 더 유배지에서 살아야 했다. 1817년 그는 마침내 해배돼 출사길이 열렸었는데 이때 서용보가 다시 그의 출사를 극력 저지했다.

다산은 유배당한 자신의 심정을 '자소(自笑·자신을 비웃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자조하고 있다.

"주제넘게 천하 일을 모두 알고파 / 이 세상 책들을 다 읽자 생각했네. / 맑은 세상 괴롭게 활에 다친 새 신세요. / 남은 목숨 이제는 그물 걸린 고기라네. / 천 년 후에 나를 알 자 있으려는지." 여기서 '그물 걸린 고기'는 바로 자신의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천 년 후에 자신을 알아줄 이가 있지 않겠느냐며 위안한다.

그러나 길고 긴 유배도 다산을 파멸시킬 수 없었다. 다산의 파멸은 바로 정적들이 그토록 바랐던 것이었지만 그는 사약의 공포를 견뎌내며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마치 두보가 곤액을 당해 시성이 됐듯 다산도 곤액을 이겨내며 사상가로 우뚝 선 셈이다. 유배지에서 황상 등 제자들을 길러내기도 했다. 그러다 중풍에 걸려 수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지만.

"나는 임술년(1802년) 봄부터 곧 저술을 업으로 삼아 붓과 벼루만을 곁에다 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았다. 그 결과로 왼쪽 어깨에 마비 증세가 나타나 마침내 폐인의 지경에 이르고, 시력이 아주 어두워져서 오직 안경에만 의지하게 되는데, 이렇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느냐?" 그리고 다산의 글에는 언제나 백성의 삶이 있었다. 다산이 42살 때 지은 '애절양'은 당시의 적폐가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한 피의 고발이다.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 피가 가득 /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아 닥친 곤액 / 잠실음형 그 어찌 죄가 있어서리오. / 민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늘." 어떤 백성이 아이를 낳았는데, 3일 만에 그 아이가 군적에 올랐고 관에서는 아이의 군포 명목으로 소를 끌고 갔다. 아이 아빠가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런 곤욕을 치른다'며 칼을 갈아 자기 양경(남자 생식기)을 잘라버렸다. 아내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편의 양경을 주워 들고 관청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으나 문지기가 도리어 호통을 치면서 쫓아버렸다는 얘기를 듣고 지은 글이다.

다산은 청복(淸福)과 열복(熱福)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 청복은 재야에서 가난해도 소박하고 운치 있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고, 열복은 벼슬길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열복을 얻은 사람은 많아도 청복을 얻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고 얘기했다.

다산은 자신의 삶을 청복에 뒀다. 그래서 귀양지 강진에서는 원포(園圃·원은 과수를 심는 공간, 포는 채소를 기르는 채마밭)를 직접 경영해 먹을거리를 자급자족했다. 또 근처 여기저기에 자투리땅을 매입해 그곳의 소출로 생활을 꾸렸다. 귀양지를 떠날 땐 그 땅의 관리를 제자들에게 맡겼다. 서울로 올라와서는 인삼포를 직접 경영했다. 유실수를 심고 채소밭을 가꾸며 뽕나무를 길렀다. 닭을 치고 가축을 길러 궁하게는 살지 않았다.

다산이 유배지의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고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로 '초서(抄書)' 습관이 꼽힌다.

"초서는 먼저 내 학문이 주장하는 바가 있은 뒤에 저울질이 마음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취하고 버림이 어렵지가 않다. 무릇 한 권의 책을 얻더라도 내 학문에 보탬이 될 만한 것은 채록해 모으고, 그렇지 않은 것은 눈길도 주지 말아야 한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답함'이라는 편지에서 자녀에게도 초서를 권하고 있다.

다산은 또 두 아들에게 '삼사재'라는 서재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삼사(三斯)란 거칠고 태만함을 멀리하며, 비루하고 도리에 어그러져 사나움을 멀리하며, 진실을 가까이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정신을 두 아들에게 물려준 것일 게다.

다산의 삶과 글에서는 사상가이자 문장가였으며 엄하지만 자상한 아버지이자 냉철한 현실개혁가였던 다산을 만날 수 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다산을 유배지로 내몬 정적들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66호(07.16~07.22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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