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의 동양철학 톺아보기]장자 ➌ 잘못된 가치와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져야..거꾸로 매달리고도 홀로 모르는구나

2014. 2. 24.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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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머리가 위, 발이 아래에 있지만 운동 삼아 물구나무를 서기도 한다. 헬스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구를 이용하면 쉽게 물구나무서기를 할 수 있지만 혼자 힘으로 하려면 금방 자세가 흐트러진다. 집에서 몸을 벽에 붙이고 물구나무서기를 해도 얼마간은 버티다가 바로 발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팔과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하고 중심을 잡기가 영 쉽지 않다.

물구나무는 몸의 자세뿐 아니라 정신 상태와도 연관 지어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우선순위를 정한다. 더 중요한 것은 앞에 두고 사소한 것은 나중으로 한다. 이를 우리 몸에 비유하자면 우선 할 일은 머리에 해당하고 뒤에 할 일은 발에 해당하는 셈이다.

장자는 사람들이 세상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더니 그들의 사고가 물구나무의 형태를 하고 있다고 봤다. 사람이 실제로 물구나무를 선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인가 거꾸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즉,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바삐 살아간다는 얘기다.

우리는 물구나무 서 있을 때에는 금세 바른 자세로 돌아오려고 하면서 왜 사고는 뒤집힌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장자는 사람이 가치의 물구나무를 서게 되는 이유를 간명하게 정리했다.

'외물에 흔들려 자기를 잃어버리고, 세속에 휘둘려 본성을 잃어버린다.' (喪己於物, 失性於俗者, 謂之倒置之民, '선성') 장자는 외물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고 사회의 평균적인 삶보다 자신의 성정에 집중하라고 요구한다. 이때 외물과 세속의 의미 외연은 상당히 넓다. 자기 자신의 성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끌어가는 모든 것이 바로 외물과 세속이다.

장자는 자신의 성정보다 사회의 평균적 잣대를 흘깃거리게 되면 그것은 '거꾸로 선 사람', 즉 '물구나무를 선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몸으로 물구나무를 서라고 하면 단 이삼 분을 버티기도 힘들어하면서, 왜 정작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금은보화처럼 여기고 사회에서 떠드는 소리에 신경 쓰느라 내면의 목소리를 등한시하는 것일까.

장자는 이를 간단하게 '도치지민(倒置之民)'이라고 정리했다. 몸으로 물구나무를 선 사람더러 "왜 저렇게 힘든 물구나무를 서고 있느냐"고 물으면서 정작 자신이 가치 전도로 인해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거꾸로 매달린 도치지민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장자는 이를 '현해(懸解)'라는 말로 표현했다. 현해는 글자 그대로 '거꾸로 매달린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장자는 이 말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맹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맹자는 포악한 정치로서 학정(虐政)과 살맛 나는 정치로서 인정(仁政)을 구별했다. 그는 "큰 나라가 살맛 나는 정치를 실시한다면 백성들은 마치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 (萬乘之國行仁政, 民之悅之, 猶解倒懸也, '공손추' 상)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은 서로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상대의 좋은 말과 표현은 서로 갖다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가 '해도현'을 고통에서 풀려나는 수사적 표현으로 사용했다면, 장자는 그것을 좀 더 다른 맥락에서 차용했다. 장자는 노자가 죽은 뒤에 사람들이 문상 오는 이야기를 통해서 현해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노담(노자)이 죽었다. 진일(秦失, 실(失)은 일(佚)과 같다)이 문상을 가서 세 차례 곡만 하고 그냥 밖으로 나왔다.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친구가 아닙니까?" 진일이 말했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렇게 조문해도 괜찮은가요?" 진일이 대답했다.

"괜찮다. 처음에 나는 노담을 지인(至人)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라네. 좀 전에 나는 이곳에서 빈소에 들어가 조문하는데, 나이 든 사람은 마치 자식을 잃은 듯이 곡하고, 젊은 사람은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듯이 곡하더군. 저 노자로 인해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따져보면 반드시 위로를 바라지 않았겠지만 위로하게 하고 곡을 바라지 않았겠지만 곡하게 하고 있네. 이것은 하늘(자연)을 저버리고 진정을 어기며 본래 부여받은 것을 잊어버린 것이오. 옛날에는 이것을 하늘을 저버린 죄라고 했네. 어쩌다 태어나니 그가 때에 맞았고 어쩌다 떠나니 그가 명에 따른 것이다. 때를 편안히 여기고 변화에 순응하면 슬픔과 즐거움이 그 속에 끼어들 수 없다네. 옛날에는 이를 천제(하늘)에 매달린 상태로부터 풀려남이라고 했지." ('양생주') 사람은 대통령이건 거지이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 피해야 할 끝이자 완전히 잊히는 상실이라면 슬플지 모른다. 죽음은 태어남과 마찬가지로 기가 변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변화를 향해 나아가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는 사태의 진행에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이입해서 기뻐서 날뛰거나 슬퍼서 축 처져 있을 필요가 없다고 봤다. 죽음은 그저 지켜보는 사태며, 찾아오지 못하게 막아야 할 사태가 아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는 '현해'를 맹자처럼 지극히 즐거운 상태에 비유하지 않고 잘못된 가치와 사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상태에 비유했음을 알 수 있다. 맹자의 말을 그대로 썼지만 다른 맥락으로 차용한 것이다. 사랑할 때는 대신 죽을 수도 있듯이 굴지만, 헤어지면 남처럼 담담해질 수 있다. 이처럼 장자는 삶에서 마주하는 사태에 감정을 투입해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하면서 그 과정에서 잘되면 웃고, 못되면 우는 일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한다.

혹자는 물을지 모른다. 과연 우리가 장자처럼 살 수 있을까.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일단 우리는 장자의 삶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의심부터 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타인의 불필요한 간섭, 혹은 선한 의도로 타인에게 다가갔다가 오히려 의심을 받았던 경험, 특정한 방향만을 허용하는 독선적 자세 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다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삶은 그리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고려시대 이규보의 '우물 속의 달을 읊다(詠井中月)'라는 시를 읽어보자.

"스님이 고운 달빛을 탐내어(山僧貪月色),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었네(幷汲一甁中). 절에 이르러 비로소 깨닫게 되리(到寺方應覺), 병 기울면 달도 따라 빈다는 걸(甁傾月亦空)." 스님이 물을 긷기 위해 계곡에 내려갔다. 마침 달이 계곡의 물에 고운 빛으로 맺혔다. 스님은 바가지로 물을 떠서 달을 물과 함께 병에 부었다. 달을 절까지 갖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이규보는 그런 스님의 마음을 읽었다. 물 항아리를 기울이더라도 달이 쏟아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어떤 대상에 한번 집착하게 되면 이 스님처럼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할 수 있다. 또 시간이 지나며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에너지를 잃고 상처를 받으며 힘겨워하기도 한다. 장자는 애초에 객관적 거리감을 두라고 조언한다. 그런 노력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는 지혜를 줄 수 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에서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가사가 있다. 이처럼 머물지 않으며 매일 이별하는 걸 장자는 말하고 있지 않을까.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45호(02.18~02.25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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