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15) 키케로의 '의무론'..쾌락은 인생의 양념에 불과
키케로의 '의무론'은 허승일 번역의 '키케로의 의무론'이 현재 유통되고 있다. 라틴 원전 번역이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인쇄됐고 비스마르크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꼭 읽으라고 권유했다는 책이 있다. 바로 로마의 '국부'로 추앙받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년)가 스토아 윤리를 바탕으로 쓴 '의무론'이다.
이 책은 키케로가 아테네에 유학 중인 아들이 정치가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서신 교육으로 써서 보낸 것을 모았다. 아들에게 정치가로서 현실적인 실천윤리를 조언해주는 동시에 아들에게 "나는 네가 모든 점에서 나를 능가해주기를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아버지의 깊은 뜻을 전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대로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공화주의자인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폼페이우스 편에 서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뿌리치고 카이사르 편에 선 것. 아버지로부터의 정치적 홀로서기인 셈이지만 이는 키케로에게 큰 배신감을 안겨줬다.
그의 죽음과 더불어 공화정도 최후를 맞았다. "나는 어느 편에 가담해야 좋을지 정말 모르겠다"고 한탄한 것에서 보듯 그는 정치적으로 '줄서기'에서 우물쭈물하다 화를 자초했다. 사람은 말년 운이 좋아야 한다고 했는데 키케로의 말년은 최악이었다. '노년'과 '우정'에 대해 책을 쓰며 노년을 예찬한 키케로는 책 내용과 달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키케로가 '의무론'을 쓸 당시(기원전 44년)는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든 시기였다. 키케로는 새로운 권력자 안토니우스를 피해 자신의 별장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암살당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주옥같은 글을 썼다. 절박한 마음이 명문(名文)을 창조하게 하는 것일까. 더욱이 당시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주의가 성행하면서 도덕적 타락이 극심했다. 그런 때에 아들에게 로마에서 아테네로 도덕적인 선과 유익함이 무엇인지를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키케로는 3권으로 구성한 이 책에서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도덕적인 선(1권)과 유익함(2권) 그리고 이 두 요인이 상충(3권)하는지 여부에 대해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은혜, 관용, 베풂 등이 유난히 자주 윤리학의 문제로 논의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은혜에 대해 강조했듯 키케로도 '의무론'에서 베푸는 것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키케로는 선행을 베풀고 호의를 베푸는 것보다 인간 본성에 더 적합한 것은 없다고 주장했다. 주의할 점은 선행을 베푸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하며, 베푸는 자의 재산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며, 친절이 각자 받을 만한 가치에 따라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길 잃고 방황하는 자에게 /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 마치 자신의 등불로 다른 사람의 등에 / 불을 붙여 주는 것과 같도다 / 그런데 남에게 불을 붙여 줬다고 해서 / 자신의 불빛이 덜 빛나는 것이 아니니라." 이는 키케로가 즐겨 인용하는, 고대 로마 시인으로 '라틴문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엔니우스의 시다. 이 시를 앞세워 키케로는 "손해가 없다면 낯선 사람일지라도 무엇이든 주라"고 했다. 받는 자에게는 이익이요, 주는 자에게도 손해는 아니기 때문이다. 키케로는 특히 돈이 있다면 자선과 관용을 베푸는 것보다 더 명예롭고 고상한 것은 없다고 아들에게 조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키케로는 돈을 아주 좋아했고 빚이 많았으며 또 사치스러웠다. 무려 8개의 별장을 소유했을 정도로.) 도덕적 선과 관련해 독특한 표현이 나온다. 의무를 수행하는 데 고려할 사항으로 든 '호네스툼'과 '데코룸'이라는 개념이다. 호네스툼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며, 데코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호네스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데코룸은 사물의 적합함에 대한 올바른 인식, 즉 내면적 감정이나 외면적 표상, 언어, 행동, 의상 등에 있어서의 '적합함'을 의미한다. '데코룸하다'는 어떤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말씨나 모습, 행동을 이른다. '데코룸(decorum)'이란 키케로가 그리스어의 'prepon'을 번역한 라틴어로 고유함, 혹은 적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특정 장소, 시대와 신분 등에 따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정의에 따라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욕망을 이성에 복종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데코룸한 것이다. 데코룸과 관련된 내용으로 인해 키케로의 '의무론'은 서양의 '교양' 텍스트가 됐고 영국에서는 '젠틀맨'의 훈육서가 됐다.
한편 시민과 국가에 대한 선행에서 특히 유념해야 할 것으로 "개인에게도 국가에도 유익하게 하고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특히 국가에 손실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 사례로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곡물배급정책을 든다. 선심 정책인 곡물배급은 대규모로 시행됐지만 이것은 이내 국고를 고갈시켰다. 결국 마르쿠스 옥타비우스는 후일 그라쿠스의 곡물법을 개정했는데 이것은 시민에게도 국가에도 다 유익한 것이었다고 강조한다.
키케로는 도덕적인 선과 유익함의 상충과 관련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유익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유익하고,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은 유익하지도 않다고 봤다. 그는 유익함과 도덕적 선의 상충 사례들을 제시하는데 이런 사례는 논술 등 각종 시험에 출제되곤 한다.
로데스섬에서 곡물 부족으로 곡가가 폭등할 때 알렉산드리아에서 배에 곡물을 가득 싣고 오고 있다. 이 정보를 착한 곡물업자가 알고 있다고 했을 때 이를 알려주지 않고 곡물을 비싸게 팔아야 할까, 아니면 이를 구매자에게 알려줘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스토아 철학자 사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고 소개한다.
이 외에도 키케로는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포도주가 저질이란 것을 알면서도 파는 사람은 사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말해야만 하는가?"라는 사례들을 제시하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책을 보면서 자신은 어느 입장에 설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키케로는 모든 쾌락은 도덕적 선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쾌락과 도덕적 선 사이에는 어떤 연결 고리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면서 다만 인생에 '양념 같은 맛'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스토아학파의 윤리 사상을 담은 '의무론'은 서양인의 기독교적 정신세계와 근대 시민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키케로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항상 유익하다.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한 것은 유익하지 못하다. 따라서 유익해 보이지만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은 것은 사실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키케로의 '의무론'은 '도덕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전반적으로 혼돈 상태였다. 그런 시대에 올바른 인식을 통해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위해서는 '욕망을 이성에 복종시키는' 인간의 본성을 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게 키케로의 '의무론'이 제시하는 실천윤리론의 핵심인데, 이 또한 서양 철학사에서 또 하나 더해진 '플라톤의 각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34호(13.11.27~12.03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