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효찬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6)그리스 로마 신화 ➌ 전쟁과 문학과 예술의 원천 '헤라의 저주'

그리스 신들은 숭고한 면과 비속한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는 '혼인의 신'이지만 제우스가 사랑한 여성에게는 끝까지 복수하고 응징하는 '저주의 화신'이기도 하다. '내 사전에 남편의 불륜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이다. 상대 여성이 제우스의 술책에 넘어갔을 경우나 강제로 당했을 경우나 상관하지 않는다. 여성 쪽에 죄가 있거나 없거나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우스와 관계를 가진 여성은 누구든 간에 징벌하려 든다. 또한 제우스의 유혹에 넘어간 불륜 당사자뿐 아니라 그 자식까지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다.
트로이 전쟁은 바로 다름 아닌 '헤라의 저주'에서 출발한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툭하면 시비를 잘 걸어 인기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바다의 정령인 테티스와 인간의 영웅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했다. 에리스는 이를 앙갚음하려고 결혼식에 나타나서 '황금사과'를 던졌다. 그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kallistei)'라고 적혀 있었다. 그 자리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세력 있고 허영심이 강한 세 여신이 있었는데 신들의 여왕인 헤라와 지혜의 여신 아테네, 사랑과 욕망의 여신 아프로디테였다. 세 여신은 서로 자기가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며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신들 중에는 누가 가장 아름답다고 결정해줄 용감한 신이 없었다. 이들 여신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제우스의 중재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그 역할을 맡았다. 그러자 세 여신 모두 파리스에게 달콤한 제안을 했다. 황금사과의 주인이라고 말해주면 헤라는 파리스를 유럽과 아시아의 왕으로, 아테네는 전투에서 절대 지지 않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아프로디테는 절세미인 헬레네와 결혼할 수 있게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이때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손을 들어줬다. 그 공으로 아프로디테는 헬레네를 선물로 줬는데 노여움을 삭이지 못한 헤라의 부추김으로 트로이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파리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죽게 된다.
여기서 '파리스의 선택'이란 표현이 나왔다. 여러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기분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뜻한다.
제우스의 불륜으로 인해 태어난 헤라클레스 역시 평생을 헤라의 저주에 시달려야 했다.
어느 날 밤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잠깐 미치게 해서 자기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게 했다. 헤라클레스는 테베에 무거운 조공을 물리던 나라 오르코메노스를 물리쳤고 그 공로로 왕녀 메가라와 결혼하게 됐다. 메가라가 셋째 아이를 낳았을 때 헤라클레스는 갑자기 미쳐 버렸다. 그는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막내둥이를 감싸려는 메가라까지 죽여 버렸다. 제정신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피바다가 된 홀에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이는 제우스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헤라가 미워한 데서 연유한 일이었다. 말하자면 헤라의 저주였던 셈이다. 헤라클레스가 갓난아이 때 뱀에 물려 죽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헤라클레스가 뱀을 손으로 잡아 죽였다고 한다. 갓난아이 헤라클레스의 침실에 뱀을 넣은 것은 헤라의 소행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아내와 자식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 신탁을 받으러 갔다. 무녀가 내린 신탁은 '미케네의 왕으로서 그의 사촌인 에우리스테우스한테로 가 어떤 일이라도 그 명령에 따르라는 것'. 에우리스테우스는 헤라클레스에게 열두 가지 고난을 겪게 했다. 그 유명한 '헤라클레스의 12가지 시련'이다. 이 열두 가지 시련의 뒤에도 역시 헤라가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헤라는 끝내 헤라클레스를 죽게 만든다. 헤라클레스가 데이아네이라를 아내로 맞아 집으로 데리고 오는 도중 어느 강에 이르렀다. 네소스라는 켄타우로스(반인반마의 괴물)가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을 업어 강을 건네주고 삯을 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혼자 먼저 건넜고 데이아네이라는 네소스에게 업혔다. 그러나 네소스가 데이아네이라를 업고 건네주는 도중에 희롱을 했다. 아내의 비명을 들은 헤라클레스는 화살을 쏘아 네소스를 죽였다. 숨이 넘어가면서 네소스는 복수를 위해 "자기 피를 받아서 간수해두면 언젠가 헤라클레스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려고 할 때 부적과 같은 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줬고 데이아네이라는 그 피를 받아뒀다.
사실 네소스의 피에는 독이 들어 있었다.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네소스의 말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옷에 네소스의 피를 발라 남편에게 보내는데 이 옷을 입자마자 마치 불로 지지는 것과 같은 무서운 고통이 헤라클레스를 엄습했다. 그는 계속 괴로워하며 집까지 왔다. 고통스러워하는 헤라클레스를 본 데이아네이라는 자기 때문에 이런 큰 변이 난 것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헤라클레스도 고통을 견디다 못해 결국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참으로 모진 여신의 복수가 아닐 수 없다. 인간보다 더 끈질기고 독한 복수다.
그리스 신화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복수와 저주의 이야기는 '아트레우스가의 저주'를 들 수 있다.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아내와 간통한 동생 티에스테스를 추방한다. 티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이 키운 아트레우스의 아들을 보내 아버지를 죽이게 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아들이 아버지인 아트레우스의 손에 죽고 말았다. 모르고 친아들을 죽인 아트레우스는 화해를 가장하고 티에스테스와 그의 두 아들을 초청해 두 아들을 몰래 죽인 다음 그 살코기로 요리해 아버지인 티에스테스의 식탁에 내놓고 머리와 손발을 내보였다. 그야말로 끔찍한 복수를 행한 것.
그러자 티에스테스가 이번에는 형인 아트레우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탁대로 자신의 친딸 펠로피아를 강제로 범해 아이기스토스를 낳게 한다. 이 아이가 장성해 티에스테스를 죽이려는 순간 친부인 것을 알게 된다. 그때 딸 펠로피아가 그 칼로 자신을 찌르고 아이기스토스는 그 칼로 아트레우스에게 복수를 한다.
아트레우스가 죽고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가 왕국을 이어받은 후에도 복수는 계속된다. 아이기스토스는 아가멤논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간통하고 아가멤논이 트로이 전쟁에서 귀국하자마자 살해한다. 이에 아가멤논의 자녀인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자신들의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살해한다.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는 법과 질서의 신 아폴론의 변호하에 아테나이 법정의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는다. 이로써 저주받은 일족에 얽힌 죄와 벌의 긴 연쇄는 끝이 났다.
헤라의 저주와 아트레우스가에 얽힌 저주의 전설은 고대 비극 작가들뿐 아니라 2000년 넘게 문학과 회화 작품에 즐겨 이용됐다.
그리스 신화의 상상력에 예술적 창조성이 가미된 게 바로 서양의 예술사이자 문화사다. 어쩌면 그리스 신화에 난무하는 '복수와 저주'의 헬레니즘 문화는 성서에서처럼 엄격한 율법과 가정을 중시하는 헤브라이즘을 통해 일종의 '정화' 내지 '승화'를 달성하면서 조화를 이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게 바로 투쟁과 복수, 저주, 욕망으로 점철된 헬레니즘 문화와 '사랑과 용서'를 강조한 헤브라이즘 문화가 하나의 융합문화를 이루면서 문명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는 서구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우리가 그리스 신화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723호(13.09.04~09.10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