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으로 떠나는 순례] 고흐/씨뿌리는 사람

2007. 11. 28.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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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상의 나그네입니다. 우리가 나그네일지라도 천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우리의 삶은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긴 도정이자 여행입니다."

반 고흐가 1876년 어느 영국 교회에서 한 설교의 일부다. 그는 이 설교에서 우리 순례의 종착지는 맨션같은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머물 처소를 마련하시려고 먼저 그곳에 가셨다는 점도 잊지 않았다.

그가 간절히 바라던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반 고흐는 예술작품으로 말씀을 전하고 싶어했다.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는 '씨뿌리는 사람'(1888)을 지금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 농부가 밀밭을 성큼성큼 걸어간다. 기탄없는 걸음에서 확신에 찬 그의 자신감을 감지할 수 있다. 뒤로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그 주위엔 웃자란 밀이 빼곡하다. 밀짚모자를 쓴 농부는 밭에 씨앗을 뿌린다.

우선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알곡이 무성한 밀밭과 헐벗은 밭의 대조, 눈부신 노랑색과 음울한 푸른색의 과도한 대조다. 농부가 선 땅은 메말라 갈라져 있고 한눈에 보아도 척박해 보인다. 개간이 안된 땅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이 속에는 과연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반 고흐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씨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한 편지에서는 "벌판의 씨 뿌리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씨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매일 죄악이 쌓이고 또 대지가 숱한 가시와 엉겅퀴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말이다"고 했다.

그림에서 주인공은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한 땅 위를 걷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은 안락한 곳이 아니라 험난한 곳이라는 것을 암시해준다. 런던 빈민가와 보리나쥬 탄광에서 가난하고 상한 영혼들을 보았던 반 고흐는 말씀의 씨앗이 어디에 떨어져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은 지금 홀홀단신이다. 오관을 채찍하듯 태양이 작열하고 있으나 딱히 어디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다.

반 고흐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단순히 그가 머물던 아를르의 풍광에 현혹되어서가 아니다. 한가하게 밀레의 모작을 만들어보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반 고흐의 버팀목인 기독교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림의 주인공은 '복음의 씨앗'을 뿌리신 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려고 했던 반 고흐 자신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가 진리를 비유(무화과나무, 추수, 농부 등)로 표현하신 것에 착안하여 반 고흐 역시 '비유의 장치'를 통해 인생의 참모습을 그려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전도자로서 살고자 했던 반 고흐가 화가가 된 이후에도 변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누가 반 고흐를 '감각적인 굴복에 휩싸인 사람'이라고 했던가. 씩씩하게 진리를 파종하는 주인공은 얼마나 놀라운가. 복음이 아름다움을 불러내고 있지 않은가!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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