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만세운동 뿌리, '천안 매봉교회'..유관순 슬픔서린 붉은 벽돌 불태워지고

3·1절을 앞둔 26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의 신앙적 뿌리인 천안 병천 매봉교회(박규억 목사)를 다녀왔다. 교회와 담장을 맞댄 유관순 생가의 뜨락엔 기독교 유적지 순례를 온 전국 교회학교 학생, 부모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주여, 이 민족과 함께하여 주소서
"오 오, 하나님이시여,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倭)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3·1 만세 함성이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1919년 3월31일 충남 천안 병천면 매봉교회.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안고 고향으로 내려온 18세 소녀 유관순은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고 거사 성공을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소녀는 매봉에 올라 만세운동을 알리는 봉화를 올렸다.
#불타도 불타지 않는 주님의 집
매봉교회 역사는 유관순의 삶처럼 처연하고 강건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매봉교회 성도들은 의연히 군비를 마련해 도왔고, 일제는 의병을 도왔다는 이유로 눈엣가시 같은 교회를 불태웠다. 그 후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가한 교인만 82명에 달하자 일제는 다시 한 번 매봉교회를 불사르고 말았다.
그러나 교회는 두 번의 환란에도 굴하지 않았다. 1908년 지역유지 유빈기,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씨, 조병옥 박사의 부친 조인원씨 등 성도들이 불굴의 믿음으로 힘을 합쳐 교회를 재건한 것. 이는 1919년 4월1일 유관순과 인근 각 지역대표들이 아우내장터에서 순국으로 외친 독립만세운동의 신앙적 뿌리가 됐다.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
4월1일 아우내장터에 역사의 해가 돋았다. 이 날 만세운동에 참가한 이는 3000여명, 이 가운데 19명이 일제의 시퍼런 총칼에 운명을 달리했고 부친 유중권씨와 어머니도 포함됐다.
곧바로 일경에 체포된 유관순은 모진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각오로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고, "누가 시켰느냐"는 심문에는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고 당당히 맞섰다.
#유관순의 유일한 슬픔
붉은 벽돌, 나무 십자가…. 매봉교회의 수려한 풍채는 유관순의 일본 검찰 기록 168㎝ 키처럼 훤칠하다. 교회 옆 나즈막이 짚을 올린 초가는 유관순의 생가. 하얀 저고리에 검은 무명치마의 그녀가 금세 사립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다.
지금의 교회는 유관순을 배출한 이화여고가 1967년 개교 80주년을 맞아 기념교회를 짓고 매봉교회라 이름 붙였으며, 그 후 1998년 기독교감리회 남부연회와 충청연회가 힘을 합쳐 재건축, 신앙 후배들의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세 나이로 감옥에서 짧은 삶을 마친 신앙인 유관순의 마지막 유언이다. 뒤돌아서는 발길이 자꾸만 멈추는 것은 왜일까.
천안=김연균 기자 ykkim@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