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와 '원세대' 사이..한 대학 안에도 뿌리깊은 '학벌주의'

[쿠키 사회] 연세대에 다녀도 다 같은 연세대생이 아니다?
최근 한 인터넷 사이트에 소개된 연세대생이 원주캠퍼스 학생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촌캠퍼스 학생 등 네티즌들로부터 사이버 테러를 당했다. 이 학생을 공격한 네티즌들은 "왜 원세대(연세대 원주캠퍼스를 비하해 부르는 은어)생이 연세대생인 척 하냐"며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다. 같은 대학 학생 사이에도 캠퍼스 위치를 놓고 우리 사회의 고질적 '학벌주의' 병폐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연대생'이라 했더니 무차별 사이버 테러
연세대생 A씨(21·여)는 얼마 전 싸이월드 '투데이 멤버(매일 회원 3명을 선정해 메인 페이지에 소개하는 코너)'에 선정됐다가 난데없이 사이버 테러의 타깃이 됐다. 자신을 "연세대 ○○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 소개하고, 미니홈피 사진첩 메뉴에 'Yonsei'란 제목의 폴더를 만든 게 화근이었다.
A씨 미니홈피의 방명록 사진첩 다이어리 등에는 인신공격성 악플이 줄을 이었다. 대부분 "미니홈피에 올린 교정사진들을 보면 분명히 원주캠퍼스 학생인데 신촌캠퍼스 학생인 척 한다"는 내용이었다. 신촌캠퍼스 학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원색적 비난글이 잇따랐다. "원주캠퍼스 학생인데 왜 소속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냐" "신촌캠퍼스 연고전 사진 등을 미니홈피에 올려 신촌 학생인 양 했다"는 식의 공격이었다. 연고전은 신촌과 원주캠퍼스 학생들이 함께 참가하는 행사다.
신촌캠퍼스 학생들은 A씨가 명동 신촌 압구정동 등에서 찍은 사진을 미니홈피에 올렸다는 이유로 '원주 청국장녀'란 별명까지 만들어 불렀다. 입에 담기 힘든 인신공격이 이어지자 A씨는 '연세대 ○○학과'라고 적은 미니홈피 프로필을 삭제하고 악성 댓글을 지운 뒤 방명록과 다이어리를 폐쇄했다. 또 미니홈피 게시판에 악플러를 향한 글을 게재했다.
"투멤(투데이 멤버)에 선정된 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지만 막상 뽑히고 나니 속상한 점도 많다"고 말문을 연 그는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이지만 한번도 이 사실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마치 내가 신촌캠퍼스 학생인 것처럼 미니홈피를 꾸며놨다고들 하는데 나는 자기소개글에도, 미니홈피에도 신촌캠퍼스에 다닌다는 말을 쓴 적이 없다"고 했다. 이어 "다만 우리 학교 이름이 연세대이기 때문에 연세대라고 적어 놓은 것 뿐"이라며 "분교에 다닌다고 무시하고 심한 말이나 욕을 하시는 분들 때문에 많이 속상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A씨가 투데이 멤버로 선정되면서 덩달아 표적이 된 원주캠퍼스 학생도 있다. B(20)씨는 A씨 미니홈피에 일촌평을 남겼다가 함께 사이버 테러를 당했다. B씨는 자신의 미니홈피에 정기 연고전 사진, 응원 사진, 서울캠퍼스와 원주캠퍼스 전경 등을 올리고 "우리 학교 너무 좋다" "연고전에서 반드시 승리하자" 등의 글을 게재한 상태였다.
이에 A씨 미니홈피에서 B씨 글을 발견한 일부 네티즌은 B씨 미니홈피를 찾아가 공격했다. 한 네티즌은 "원세대이면서 연세대라 하는건 위법성은 없지만 사기다! 원주의 맑은 공기와 물을 마셔서 그런지 아름다우시군요"라며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 B씨 역시 미니홈피를 완전히 닫은 상태다.
◇신촌과 원주 사이… 보이지 않는 감정의 벽
두 사람의 미니홈피 폐쇄로 사이버 테러는 일단락됐지만 연세대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선 신촌과 원주 캠퍼스 학생간에 감정싸움에 계속되고 있다.
자신을 신촌캠퍼스 소속이라 밝힌 한 학생은 이 사이트에서 "대학이란 비슷한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모여 공부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곳"이라며 "신촌캠퍼스와 원주캠퍼스 학생은 성장과정 자체가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떻게 연세와 원세를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냐"고까지 했다. 이처럼 같은 대학에서 '학벌'을 따지는 글들은 장난으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진지한 장문이었고, 상당히 많은 수가 올라왔다.
이에 원주캠퍼스에 다닌다는 한 학생은 "신촌 학생들이 중고교 때 공부 잘했다고 강조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 입시관문을 통과했다"며 "신촌캠퍼스 학생들이 어느 학교 다니는 지 밝혀야 할 때 그냥 연세대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도 일일이 설명하기 귀찮아 그렇게 대답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원주캠퍼스 출신이라 밝힌 한 직장인은 "얼마 전 회사 동료가 연세대 출신 친구를 소개해 준다고 해 그러라고 했더니 내가 원주 출신이란 걸 알고는 그 연세대 출신 친구가 '소개해 줄 필요 없다'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며 "현실적으로 동문 의식 같은 건 바라지도 않지만 사회에선 서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으면 한다"고 적었다.
◇'학벌주의 타파' 그렇게 외쳐도…학생들 몸에는 '학벌'이 배 있다?
대학 입학성적에 따라 능력을 평가해 한 줄로 세우는 학벌주의는 이미 수 차례 지적돼 온 우리 사회 고질병이다. 이를 철폐하려는 노력도 범정부적 차원에서 꾸준히 계속돼 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학력차별 철폐를 공약으로 내걸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언급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학벌주의의 심각성을 수 차례 강조했다. 지난해엔 학벌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기업에도 최근 학력 파괴 바람이 불었다. 외환은행은 지난해 학력과 연령 제한을 없앤 '개방형 채용'을 실시해 40대 주부·상업고 출신·직업군인 등 다양한 신입사원을 선발해 화제를 모았다. 한국은행·금융감독원·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대한주택공사·에너지관리공단·한국주택금융공사 등 주요 공기업도 대부분 채용 조건에서 학력 제한을 없앤 상태다.
대한주택보증도 지난해 채용인원의 30%를 지방대 출신자 중 뽑았고 증권예탁원은 지방대 출신을 매년 20%씩 할당해 뽑고 있다. 또 KBS·가스안전공사·산업은행·우리은행·기업은행·동국제강 등도 지방대 출신자를 일정 비율 뽑는 자체 규정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여전히 학벌주의는 뿌리깊다. 응시자격은 제한하지 않는다 해도 채용과정에서 출신대학이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학벌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벌, 또 하나의 카스트인가'의 저자 국민대 김동훈 교수(법학과)는 "우리나라 학생들은 어린시절부터 끝없이 경쟁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이미 학벌주의가 체화돼 있는 상태"라면서 "이런 풍토 때문에 사회 내부적 대학 서열의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 분석했다.
김 교수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 내부의 대학 서열화 풍토가 깨지지 않는다면 이런 죄없는 피해자가 또 생길 수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유지은 기자 her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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