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 '우행시' '여병추'..줄임말의 미학? 유희?

2006. 8. 2. 10:35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쿠키 톡톡] 서울 홍익대 부근에 '정우성'이란 이름의 주점이 있다. '정말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까'의 줄임말이다. 호기심 많은 여성의 눈길을 끄는 줄임말 마케팅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냉면집에서 "물냉면 하나,비빔냉면 하나요"라고 주문하면 종업원은 대뜸 주방을 향해 "냉비!"라고 소리친다. '물냉(물냉면)'과 '비냉(비빔냉면)'으로 줄인 것도 모자라 이 둘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이 해마다 발간하는 연구보고서 <신어>에 따르면 사회 경제 통신 분야에서 새 어휘가 가장 많이 만들어진다. 이미 익숙해진 자게(자유게시판),급질(급한 질문),즐감(즐거운 감상) 등 인터넷 조어를 비롯해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리장),미자(미성년자-청소년들 사이에서의 은어),베프(베스트 프렌드),겨털(겨드랑이털),자소서(자기소개서) 같은 줄임말 46개가 지난해 <신어>에 새로 등재됐다.

줄임말은 왜 이처럼 우리의 혀를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 탓인가? 물론 조급증과도 무관치 않다. 하지만 이는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과 유럽 젊은층 사이에도 줄임말이 급속히 확산되고 있고 어려운 문자에 골머리를 앓는 중국에서도 신조어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인터넷이다.

◇암호 같은 누리꾼 언어

줄임말 생성의 주체는 10대 청소년이다. 각종 드라마 영화 게임 등 젊은이가 열광하는 콘텐츠는 필연적으로 신조어를 파생시킨다. KBS 인기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간단히 '미사'로 통했고 아직 개봉도 하지 않은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우행시'로,'연애,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연애참'으로 표현한다. 줄임 방식의 일정한 규칙도 없다. 그저 입에 달라붙는 말로 축약한다.

청소년이 주로 몰리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난성 댓글이 자주 눈에 띈다. 이 역시 줄임말이다. 주로 긴 문장을 간단히 세음절로 압축시킨다. 예를 들어 '병설리'는 '병신을 설레게 하는 리플','여병추'는 '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이뭐병'은 '이거 뭐 병신도 아니고'의 뜻을 담고 있다. 어른은 거의 알아듣기 힘든 암호 수준이다. 포털 사이트 지식 검색에는 이런 표현의 뜻을 묻는 질문이 수시로 올라온다.

◇시사용어도 줄임말이 대세

극심한 취업난 등 우리 사회 단면을 보여주는 시사어에도 줄임말이 늘고 있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다)은 이미 고유명사처럼 통용된다. 화백(화려한 백수),십장생(10대들도 장차 백수를 생각해야 한다),삼일절(31세면 취업길 막혀 절망한다) 등 기존 어휘를 전혀 다른 뜻의 줄임말로 통용시키는 방식도 유행이다.

이목을 끄는 새로운 캐릭터의 부상도 줄임말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떨녀'(떨듯이 춤추는 여자),'개똥녀'(지하철에서 개똥을 처리하지 않은 여자),'치우녀'(월드컵 응원장 쓰레기 치우는 여자),'시청녀'(응원을 위해 시청에 나온 여자),'훈남'(외모가 아닌 다른 매력의 훈훈한 남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빨리빨리' 문화? 세계적 흐름!

1990년대 중·후반 무선호출기(일명 삐삐)부터 시작해 휴대전화와 인터넷에 이르는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젊은 '언중'의 언어생활이 격변기를 맞고 있다. 흔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조급증이 줄임말 홍수로 나타난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경향은 세계적 추세다. 온라인 공간을 좀더 편리하게,좀더 신속하게 즐기려는 심리에서 나온 필연적 결과인 셈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유럽과 미국도 어른들은 모르는 줄임말이 유행이고 중국에서도 신조어 양산에 당국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 청소년도 우리 10대처럼 갖가지 인터넷 은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10Q' 는 'Thank you'를 의미하고 'cb'는 'come back'을 뜻한다. 또 'ASLR'은 나이(age) 성별(sex) 주거지(location) 인종(race)을 묻는 말로 온라인 상에서 채팅할 때 사용된다.

또 조지 부시 대통령을 'wpe(역대 최악의 대통령,worst president ever)'라고 부르며 조롱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나라 포털 사이트처럼 미국의 각종 인터넷 미디어와 위키디피아 등 지식 검색 사이트에서 이런 은어의 뜻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역시 신조어나 기호문자가 한자보다 더 많이 사용된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중국 교육부와 국가언어위원회가 5월 발표한 '언어생활실태 보고서'는 GG(형(兄)의 중문발음 줄임말)나 PK(player killed·탈락) 등 은어가 55% 차지한다고 밝혔다. 또 인터넷에서 '지지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頂(머리로 받치다)'자가 전체 글자 중 가장 높은 사용빈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기도 했다. 중국 전문가들은 줄임말 현상에 대해 "현실 언어를 보완하는 기능은 인정해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부작용은 없나-언어유희? 언어파괴?

국립국어원 김한샘 연구원은 전문가마다 보는 시각이 다르다고 전한다. "문화평론계 전문가들은 또래문화의 일종인 신조어에서 톡톡 튀는 언어감각과 창의성을 엿볼 수 있어 긍정적이란 입장이지만,국어교육계 전문가들은 신조어 남발이 세대차이를 심화시키고 언어규칙을 훼손하므로 자제돼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안남일 교수는 "언어를 가지고 놀기 이전에 언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우선" 이라며 "한창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언어를 익혀야 할 청소년기에 무분별한 신조어 사용은 학습장애를 낳을 수도 있다"고 충고했다.국민일보 쿠키뉴스 구민지 기자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 국민일보 쿠키뉴스(www.kukinew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