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장수서 '죽' 사장님 변신 본죽 김철호 대표

'호떡장수에서 죽 프랜차이즈 사장으로'
'본(本)죽'의 김철호(43) 대표만한 인생역전의 주인공도 드물다. 500원짜리 호떡을 팔던 노점상이 하루 아침에 500개 가맹점을 둔 프랜차이즈 업체 사장이 될 줄 누가 알았줄이야…. 주변에서는 물론이고 김 대표 스스로도 상상조차 못한 일이었다. 크나 큰 시련은 축복의 '전주곡'이라던가. 죽 전문점의 지평을 연 김대표를 서울 관철동 피아노거리에 있는 본죽 사무실에서 만났다.
"저를 보셨어요? 아. 정말이지 그때 생각하면…. 정말 힘들었습니다. 지하철 표를 살 돈도 없더라고요." 몇 년 전 친구와 함께 우연히 김 대표의 호떡 가게에 들렀던 경험을 얘기하자 그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되내었다.
1998년. 김대표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무일푼으로 거리로 내몰렸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 와중에도 작은 음식점이라도 차려보겠다며 요리학원을 찾아갔고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공짜 수업을 듣게 됐다. 새벽부터 밤 9시,10시까지 꼬박 학원에 있어야 했던 그가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은 호떡장사. 숙대입구역 앞에서 귀가하는 학생들과 취객들을 상대로 호떡을 팔았다. 비록 노점상이지만 나름대로 양복을 갖춰입고 '꿀떡개비'라는 브랜드를 붙여 장사를 했다. 지하철 티켓 살 돈이 없어 역무원에게 통사정을 할 정도로 형편은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꿋꿋이 버텼다.
그런 그도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병원신세를 지던 아내와 호떡으로 연명하다시피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면 실의에 빠지곤 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어느날 호떡장비를 대준 친구가 사업을 같이 해보자며 김씨에게 제안을 해왔다. 요리학원이지만 창업 컨설팅을 해주는 이색사업이었다. 컨설팅까지 해주는 요리학원은 없었기 때문에 호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살림이 펴는가 했다. 하지만 주로 자금업무를 맡아온 친구가 본격적으로 학원과 컨설팅업무에 뛰어들면서 충돌이 발생했고 김씨는 다시 빈털터리로 돌아왔다. 2002년 봄의 일이다.
"어차피 남의 것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창업컨설팅을 하면서 오래전부터 눈여겨왔던 죽전문점을 열기로 했습니다. '죽쒀서 개준다','왜 하필 죽이냐'며 주위에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조리가 까다로운 죽이야말로 '블루오션'이란 확신이 들더군요."
김씨는 부인 최복이씨와 전국의 죽집이란 죽집은 다 다니면서 맛을 보고 6개월동안 죽을 쑤며 연구에 들어갔다. 죽은 오랜시간 정성을 들여 끓여야하는 음식이라지만 부부는 13가지 레시피와 조리비법을 개발해 단시간에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창업비용. 전재산을 털어도 구멍가게 하나 내지 못할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문 열면 망한다'는 점포가 헐값에 그 앞에 떨어졌다.
대학로 서울대병원 옆 이면도로에서 30여미터 들어간 건물 2층 점포로 2년간 네차례나 망한 곳이었다. 권리금은 최저가격으로,대신 월세를 높게 쳐서 점포를 구했다. 지금의 본죽 대학로 1호점이다.
3년이 지난 지금 본죽은 전국 500여개 가맹점에서 하루 5만그릇 가까이 파는 죽 전문 프랜차이즈로 성장했다. 푸짐한 양에 다양한 메뉴,카페형 인테리어로 차별화한 본죽. 여기에 음식의 '기본'인 맛과 위생,정성에 충실하겠다는 그의 사명감이 성공의 밑바탕이 됐다. 김대표의 다음 목표는 해외시장이다.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도쿄 아카사카에 매장을 낸 데 이어 이달 미 LA의 월셔 블루버드에 점포를 오픈했다. 국내보다 단가를 높게 책정했지만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다. 한국의 고유음식이자 '슬로우 푸드'인 죽으로 전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김대표.
기도로 하루를 시작해 기도로 하루를 맺는 독실한 크리스찬이기도 한 그는 아내와 함께 사역에도 힘을 쏟고 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만큼 항상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베트남이나 중국 등 복음이 필요한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이경선 기자 boky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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