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근위병의 조건: 키 175cm,나이 25세,미혼,그리고 스위스 국적

2005. 11. 1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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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지구촌=이탈리아]○…로마의 바티칸 시국을 찾는 많은 여행객들은 화려하게 채색된 의상에 긴 창을 곧추세워 들고있는 스위스 근위병과 사진을 멋지게 찍곤 하지만 이들 중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 근위병들의 역사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스위스 용병들이 정식으로 교황의 직속근위대로 고용이 된 것은 1506년으로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 관계가 계속 이어져 내려오며 전통으로 굳어져 버린 상태이다.

그런데 왜 하고 많은 민족과 국가들 중에서 스위스를 선택하였고 그들의 군대를 용병으로 선택하였을까?

가난했기에 택한 운명

스위스는 1291년 Federazione elvetica(헬비틱 연방국)라는 이름 하에 26개의 Cantoni(작은 국가)가 연합하여 연방국으로 탄생되었지만 당시 인구 50만 명이 먹고 살기에는 너무도 인구밀도가 높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기에 빈곤이라는 가장 큰 국가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선호된 해결책은 외국으로 가서 용병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스위스 중앙정부는 이를 위해 약 1만5000명의 장정을 선택하여 이들 중에서 용병을 선발할 수 있게 하였으며 용병의 대가로 곡식과 소금 등 다른 필수 물품 등을 받곤 하였다. 스위스인들은 용병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일종의 일시적인 여름철 이민으로 간주하였으며, 단기간 전쟁에 참여한 후 겨울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받은 봉급과 전리품들로 생활하였다.

스위스 용병들은 기병대도 없었고 중무장 전쟁무기도 없었기에 다른 어떤 군대의 전투전략보다 뛰어난 전술을 개발해 냄으로 당시의 최강의 보병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였다.

최강의 전투력,용맹과 충성심

철갑으로 둘러싸인 듯한 관통되지 않는 움직이는 방벽과 같은 대형으로 전투하는 스위스 군대는 13-14세기에 이미 이태리와 독일에서 크게 활약을 한 바가 있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으로부터 용병 요청도 받았다. 특히 1400년대 말 프랑스의 찰스 8세(Carlo 8세)가 이태리반도에서 전쟁을 할 때 스위스 용병은 군대의 최강 핵심전력을 이루었으며 바로 이들의 용맹과 충성심 덕분에 찰스 8세는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최강의 전투력에 용맹과 충성심을 갖춘 이 스위스 용병들의 모습은 교황 시스토 4세로 하여금 1479년 스위스와 용병채용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동맹을 맺게 하였다. 시스토 교황은 또한 성 펠레그리노(S. Pellegrino) 교회 근처(지금의 Via Del Pellegrino)에 숙소를 건립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수 많은 스위스 용병들은 이태리의 귀족들과 교황 Alessandro 6세 등에 의해 로마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당시 찰스 8세가 스위스 용병을 거느리고 나폴리와 전쟁을 벌일 때 그와 함께 있었다가 그 후 프랑스에서 지내던 추기경 Giuliano della Rovere 는 스위스 용병들에 대하여 잘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추기경이 1503년 교황으로 선출된 Giulio 2세로 1506년 1월22일 공식적으로 교황청 스위스 근위대를 탄생시킨다.

이날 저녁, 날이 저물 무렵 150명의 스위스 용병이 대장Kaspar von Silenen의 지휘 하에 Porta del Popolo를 통하여 처음으로 바티칸에 들어와 Giulio 2세의 축도를 받으면서 교황을 위한 스위스 근위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었다.

목숨을 버려 교황을 지키다

이후 교황의 사설 근위병으로만 활동한 것이 아니라 교황이 참전하는 전쟁에서도 활약하던 스위스 근위대는 1527년 5월 6일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가의 찰스 5세의 용병들인 lanzichenecchi들이 벌린 로마대약탈이 발발할 때,그들의 교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드러냈다.

당시 189명 이었던 근위병들은 교황 Clemente 7세를 구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용맹하게 저항하다가 성 베드로 성당의 제단을 피로 물들이며 참혹하게 전사하였다. 이들 중 단지 42명의 근위병만이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교황을 데리고 Castel Sant'Angelo로 피신하게 되는데 결국 6월 5일 교황은 목숨을 유지하는 대가로 Ostia, Civitavecchia, Civita Castellana,Modena, Parma, Piacenza의 영유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전쟁배상비와 포로석방비 등 막대한 금액을 지불하면서 항복을 하였다.

또한 교황의 근위대는 200명의 스페인병사와 lanzichenecchi로 대치되는데, 교황은 생존한 스위스 근위병들을 근위대에 넣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48명 중 원하는 12명만이 다시 근위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스위스 용병 위한 교회도 건립

이 로마의 대약탈이 지나간 후 로마인들은 교황Clemente에게 근위병을 다시 충성스런 스위스병사로 대체할 것을 종용하며 비용까지 제공하였으나 결국 차후에 교황자리에 오른 Paolo 3세가,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와 대립하면서 1548년 2월 3일 225명의 스위스 용병으로 근위대를 재창설하게 되었다.

1555년 교황 Marcello 2세는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는데 무장세력이 필요없다고 하며 스위스 근위대를 해산하려고 하였으나 1561년 Pio 4세는 스위스 근위대와 모든 계약조항을 갱신하였으며 Pio 5세는 1568년 바티칸의 스위스인 구역에 그들의 수호성인인 S. Martino e Sebastiano교회를 건립하게 하였다.

키 175이상,25세 이하의 총각만 OK

역사의 뒤안길에서 한결같이 교황과 바티칸에 충성을 다 해온 스위스 근위대는 교황 Pio 9세에 의해 1914년 100명의 병사와 6명의 장교(대장포함)로 한 동안 그 수가 규정되었다.키는 175cm 이상, 25세 이하의 미혼(2년 동안 바티칸내의 막사에서 근무한 후 결혼을 할 수 있음), 군복무를 마친 국적이 스위스인 사람만이 지원할 수 있는 교황청 스위스 근위병들은 1970년에 두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Corpo della Guardia Svizzera(스위스 근위대- 총 73명)로 전통적인 임무인 교황의 신변과 거주지 보호, 모든 교황의 직무수행에 동반참석하는 속칭 보디가드의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하나는 Corpo di Vigilanza(초계부대- 총 100명)로 바티칸의 출입구와 주요 부처에 대한 경계근무를 한다.

속설에 Michelangelo가 디자인하였다는 화려한 유니폼에 전통의 무기인 Alabarda(끝부분에 도끼날이 달린 창)을 들고 장엄한 고요 속에 오늘도 성도 바티칸을 충만한 신앙심으로 수호하고 있는 스위스 근위대는 2006년 1월 22일 창설 500주년을 기념하는 거대한 행사를 맞이할 것이라 예상이 된다. -조민상(밀라노 한이문화연구원 www.cricc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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