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신 많이 봐서 좋겠다구요?"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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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클릭엔터테인먼트 |
먼저 에로비디오 업계에서 전해오는 전설 한 토막.
1999년 나른했던 늦봄 어느 하루. 서울에서 경기도 성남으로 가는 도로의 한 육교 위. 백주대낮에 남녀 한 쌍이 전라로 베드신을 벌였다.
아래를 지나던 차들이 멈춰서 '이게 무슨 일인가'라며 올려다 본 건 불문가지. 평소엔 통행량이 극히 적은 그 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차량이 100여대에 이르렀다. 육교 아래 차도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300여명의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가운데 대담한 연기를 보여준 여배우는 클릭엔터테인먼트라는 에로비디오 제작사의 간판이었던 이규영씨, 촬영되던 비디오의 제목은 <바람꽃>이었다. 에로배우답지 않은(?) 깜찍한 외모로 주목받았던 그녀는 출시하는 비디오마다 판매고가 1만장에 이르렀고, 편당 개런티가 500만원을 상회했던 업계의 '스타 중 스타'였다.
신나는 공짜구경을 만끽하던 사람들 중 일부는, 만들어지고 있는 비디오의 제목을 물어오기도 했다. 추후 자신이 빌려볼 비디오 목록에 추가시키고자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비디오테이프 영업사원이 많게는 하루에 현금 1억원을 수금해오던 에로비디오업계의 마지막 호황기였다.
산업으로서의 가치 상실한 에로비디오
그로부터 6년. 에로비디오업계의 '봄날'은 갔다. 인터넷에 범람하는 각종 음란 동영상과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난 포르노사이트는 에로비디오 시장을 궤멸시켰다. 편당 5000만원에 육박했던 제작비는 10분의 1로 떨어졌고, 언필칭 '대박'으로 이야기되던 1만장 판매는 옛날 이야기가 됐다.
자본과 배우 수급력을 갖춘 제작사 대부분이 도산하는 바람에 현재는 유호 프로덕션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배우는 90년대에 비해 20% 수준으로 줄었고, 활동하던 감독 역시 4분의 1 가량만이 남았다.
<바람꽃>을 비롯 <새 됐어> <섹스 목걸이> 등의 히트 에로물을 연출한 이필립(41) 감독은 잘라 말한다. "산업으로서의 에로비디오 시장은 완전히 붕괴됐다."
하지만, 그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밥 먹고 애 키우며 사는' 생활인. 호시절을 그리워하며 마냥 넋 놓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성인인증 후 휴대전화를 통해 서비스되는 에로물의 제작은 이들이 내놓은 궁여지책 중 하나다. 기자는 26일 새벽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에로영상물을 만드는 시네마제작소의 성인 뮤직드라마 제작현장에 동행했다.
아래는 그날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촬영현장 풍경이다.
26일 AM 5:55 - 해가 떠오르기 전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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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필립 감독. | |
| ⓒ2005 홍성식 |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 위치한 시네마제작소 사무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인 새벽 6시지만, 이필립 감독과 주현일 제작실장은 벌써 일어나 새롭게 시도되는 성인용 뮤직드라마 촬영 준비에 바쁘다.
전날 예약한 촬영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소품을 챙기고, 20여명 가까운 배우와 스태프들이 이동할 차량 섭외에 정신이 없다.
6시 30분경엔 촬영감독 M씨가 사무실에 들어와 계약서를 쓴다. CF와 뮤직비디오를 주로 찍어온 M씨는 에로물 촬영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작품 촬영 탓에 연 3일째 잠을 제대로 못 자 눈동자가 붉게 충혈돼 있다.
이어 도착한 사람은 에로배우 데뷔 2년차인 해일(24)씨. 180cm가 넘는 큰 키에 잘 생긴 얼굴이다. 그에게 물었다.
- 이 일을 하기 전에는 뭘 했고, 가장 힘든 점은 뭔가?
"카페에서 웨이터 등으로 일했다. 인터넷에서 배우모집 공고를 보고 시작했다. 촬영이 보통 새벽에서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져 잠을 못 자는 게 가장 힘들다."
-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일당으로 받는다. 30~50만원 정도고 한 달에 10일 정도 일한다."
- 여자친구는 당신의 직업을 알고 있는지. 사회적 편견 탓에 어려움도 있을텐데.
"알고 있다. 일로서 이해해준다. 사회적 편견이 있겠지만 신경 안 쓰려고 한다. 내가 하는 건 연기다. 실생활이 아니다."
거리가 밝아지기 시작한 아침 7시 10분. 인근 해장국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 여배우인 나영(26)과 보리(24)씨가 도착한다. 두 여배우보다 먼저 조명팀 2명과 스틸사진을 촬영할 P스튜디오 팀장, 조연출 등이 합류했다.
잠이 덜 달아난 탓에 퍽퍽하게 느껴지는 밥을 억지로 한 술씩 뜨고 차에 나눠 탄 배우와 스태프들이 첫 촬영장소인 양화동 선유도공원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이렇듯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건 빠듯한 제작비를 가지고 속전속결로 작품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 출근시간 전이라 도로는 비교적 한산했다.
AM 8:30 - "여기 간다니까 선배들이 되게 부러워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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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유도에서의 촬영에 여념이 없는 스텝과 배우들. |
| ⓒ2005 홍성식 |
선유도공원에 도착한 이필립 감독과 촬영감독은 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여배우들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챙겨줄 스타일리스트 K씨와 고공 촬영에 사용되는 크레인 등을 대여하는 업체에서 일하는 스물일곱 살 총각 P씨 등이 공원으로 왔다.
공중파방송 드라마와 쇼 제작현장에는 많이 가봤지만 에로물 촬영장엔 처음이라는 P씨는 "선배들이 여기 간다니까 부러워하던데요, '야, 공원에서도 (베드신을) 찍냐'고 그러면서요"라며 웃는다.
이어 이번 성인 뮤직드라마를 제작 의뢰한 모바일 콘텐츠업체 관계자가 현장에 도착했다. 그와 짤막하게 인터뷰를 했다.
- 모바일(휴대폰)용 성인 동영상은 어떤 유통구조를 거치나?
"우리가 제작사를 선정해 영상을 만들고 이동통신사의 망을 빌어 서비스한다. 누드포토의 경우도 비슷한 경로를 거친다."
- 이번 작품은 어떤 기획 하에 만들어지는 것인지.
"성인용 뮤직드라마다. 인터넷 음란물과 달리 드라마가 있는 차별화된 성인물을 기획했다. 이 시장도 경쟁이 만만치 않아 마구잡이식 제작으로는 살아남기가 힘들다. 남다른 아이템과 반짝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완성된 영상은 모바일 상에서 성인 주말드라마로 상영된다."
- 누드사진이나 성인동영상을 보는 휴대폰 사용자는 어느 정도인가?
"약 300만명 가량이 한번쯤은 봤고, 세칭 마니아는 20~3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전체 핸드폰 이용자의 1% 정도다."
선유도에서의 촬영은 정오를 넘겨 오후 2시경까지 계속됐다. 남자가 휴대폰을 매개로 여자를 유혹하고 만나는 장면 등이 공원 벤치와 카페에서 연출됐다. 소풍나온 초등학생들이 짧은치마를 입은 나영씨를 보곤 "언니 예쁘다"고 재잘거린다. P씨의 기대와는 달리 야외 베드신은 없었다. 늦은 점심을 먹고 다음 촬영지인 여의도 국회의사당 뒤편 도로로 자리를 옮겼다.
PM 2:35 - 구경나온 의무경찰들, 여배우 보며 쑥스럽게 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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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의사당 인근 도로에서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 |
| ⓒ2005 홍성식 |
남자와 여자가 오픈카로 드라이브하는 장면이 촬영됐다. 인근을 지나던 의무경찰 4명이 뭘 하는 건지 묻는다. 전후 상황을 듣고는 잠시 잠깐 구경꾼이 됐다.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A(23)씨에게 물었다. "재밌어요?" "배우를 직접 보니까 신기하잖아요." 올 굵은 보리씨의 망사스타킹을 힐끗힐끗 쳐다보던 그가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쳐다보며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이필립 감독이 원하는 화면이 나오지 않아 NG가 거듭됐다. 현장에 있던 촬영장비 대여업체 대표 J씨는 "이 선배는 지나치게 완벽한 게 문제야. 누가 에로물 촬영에 고공촬영 크레인을 써. 그냥 대충하지"라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한다.
이 감독이 KBS 드라마제작국에서 계약직 조연출로 일하던 시절부터 알아온 J씨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언제나 이필립 감독 편이고, 이 감독의 완벽주의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마음에 드는 컷이 나올 때까지 찍고 다시 찍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다. 사전에 예약해놓은 호텔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이 한참 넘었다.
마음은 급하지만, 강남 젤리모텔로 향하는 길의 교통체증은 제작진의 급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꽉 막혀있었다.
일에 빠지면 몰입하는 스타일인 이필립 감독과 스태프들을 챙겨야하는 주현일 실장은 새벽부터 그때까지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히는 도로에서 이 감독이 푸념처럼 말했다. "너나 없이 먹고사는 게 참 힘듭니다. 그죠?"
PM 8:10 - 8시간에 걸친 베드신 촬영... 배우도 스태프도 파김치
저녁 7시 30분경 예약된 호텔에 도착, 성인 영상물의 '핵심'인 베드신 촬영에 들어갔다. 4개의 방을 옮겨가며 4개의 베드신이 이어졌다. 카메라는 배우들의 동선을 따라 소파와 침대, 욕조로 이동했다. 촬영 중간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나영씨와 이야기를 나눴다.
- 이 일을 한지는 얼마나 됐나? 열악해진 제작환경 탓에 개런티가 줄지는 않았는지.
"5년째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개런티는 크게 변화가 없다(여배우의 경우 남자배우의 2~3배를 받는다)."
- 언제가 가장 힘든가?
"보다시피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베드신을 찍을 때다. 게다가 샤워장면이나 욕조에서 베드신을 찍을 땐 공사(배우의 주요 부위를 살색 테이프로 가리는 것)한 게 떨어지기도 해 곤란한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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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남의 젤리호텔에서 진행된 베드신 촬영. |
| ⓒ2005 홍성식 |
나영씨와 보리씨가 해일씨를 상대로 번갈아가며 베드신을 찍는 가운데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거의 쉬지 않고 새벽부터 촬영에 시달린 해일씨는 몹시 피곤한 표정이다. 바쁜 일정 탓에 이틀째 잠을 못 잤다는 조명팀 기사도 눈꺼풀이 천근만근인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인다. 처음에는 베드신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촬영장비 대여업체 P씨 역시 이젠 지겹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들의 피곤함과는 별개로 8시간 동안 베드신 촬영은 계속됐다. 취재를 시작할 당시 천박한 호기심이 없지 않았던 기자는 졸린 눈을 비비며 문득 깨닫는다. '그래, 이 사람들은 놀이가 아닌 일을 하고 있는 거지.' 스태프 중 한 명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다. "노가다(막노동)도 이런 노가다가 없어요. 3D업종이죠."
27일 AM 4:05 - "힘들겠다고요? 하지만, 내일도 똑 같이 찍어야죠"
하루치 촬영이 모두 끝났다. 시계는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제 새벽 6시부터 시작된 22시간의 강행군. 배우도 스태프도 모두 녹초가 됐다. 하지만, 3~4시간쯤 눈을 붙이고 나면 다시 다음 날 촬영분을 찍어야 한다.
저녁을 빵과 우유로 대신하며 힘겹게 달려온 하루. 촬영장소인 젤리모텔 계단을 내려가는 그들의 어깨가 처져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꿈 하나쯤은 담고 산다. 자신들의 일터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위기상황에 처한 에로물 제작관계자들이 꿈꾸는 희망과 미래는 과연 어떤 빛깔일지. 휘황한 네온사인조차 꺼진 새벽의 강남거리가 깊은 바닷속처럼 어둡고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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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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