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상용 기자의 만화가 열전] 6 박봉성 (1949년생)

[일간스포츠] ▧재능 부족으로 스승에게 내침을 당하다
중학생 때부터 만화가 문하생으로 뛰어든 박봉성이 작가로서 이름을 낸 것은 35세 때다. 그냥 습작이 아니라 정식으로 배웠으니 다른 만화가들보다 훨씬 빨리 시작한 편인데 이름을 날린 시점은 누구보다 늦다. 그만큼 오랫동안 고생을 했고, 처음부터 재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1949년 진해에서 출생한 박봉성은 6.25 무렵부터 부산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수박장사, 어머니는 생선장사를 했고 위로 형 셋에 누나가 한 명 있었다. 다른 형제들과는 나이 차이가 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진 매일 1원짜리 하나 받아들고 집을 혼자 지켰다. 굶지는 않았지만 집안은 상당히 어려웠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습작했는데, 항상 자신이 어떤 스토리를 만들고 거기에 맞춰 그림을 그렸다. 이런 방식은 평생 계속됐고, 어린 시절 주로 그림 위주로 연습했던 대부분의 작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굳혔다.
군에서 휴가를 나온 작은형이 그의 결심을 듣고 반나절 동안 개 패듯이 그를 두들겨팼다. 그래도 결심은 흔들림 없었고 결국 만화가 오명천의 밑에서 만화를 배울 기회를 잡게 됐다. 그러나 미운 오리새끼도 이런 오리가 없다. 스승은 도저히 가망성이 없다며 그를 내쳤다. 그는 2년 후에 스승을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잘 할 수 있다며 빌어 겨우 받아들여졌다.
1964년 16세 때의 일이다. 내가 이 책에서 다루는 18명의 만화가 중 실력이 없다고 스승에게 내침을 당한 경우는 박봉성이 유일한 듯하다. 스승이 볼 땐 아주 희한한 제자였다. 박봉성 자신이 짠 스토리로 그림을 그리면 그럴듯하게 하면서도 화실에서 필요한 그림을 할 땐 아주 엉망이었다. 가능성은 있는 것 같은데 화실에는 보탬이 안 되는 존재였다. 박봉성은 같이 경쟁하는 화실 식구들에게 눈총을 받으면서도 밤늦게까지 자기 작품은 따로 연습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내가 과연 만화가가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짙게 깔려 있었다.
어느 날 지켜보다 못한 스승은 "네가 한번 스토리를 써봐라"는 지시를 내렸다. 스토리마저 엉망이면 아예 포기하려는 심정도 있었으리라. 전에도 한 번 내친 적이있으니. 박봉성은 스토리를 썼고 예상 외로 그 스토리는 화실 작품으로 출간돼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 다음 또 스토리를 쓸 땐 콘티까지 같이 짜버렸다. 콘티에 희미하게 레이아웃과 연출까지 잡아버렸는데, 혼나기는커녕 스승이 별로 수정을 안하고 연출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다. 스승은 갑자기 데생까지 해보라고 했다. 데생이란 화실 최고의 그림장이가 하는 것으로 누가 봐도 박봉성이 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니 이 지시는 박봉성의 실력을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실력
이 그때부터 부쩍 늘었는데, 화실 선배들이 "너처럼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인간 처음 봤다"며 혀를 내둘렀다. 남의 스토리가 아닌, 자신의 스토리로 데생까지 하니 재미가 있었고, 미친듯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완전히 스승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군에 입대했다.
▧거리의 스케치 고행 이어 폐결핵이 찾아오고
제대 직후의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그는 둥지를 그리워하는 새처럼 스승을 찾아 갔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소년한국일보의 소속 작가였던 오명천은 그동안 발행 권수를 제한당해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했고, 화실 인원을 줄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제자가 찾아왔으니 그다지 반갑지는 안았으리라. 스승은 화실이 어렵다기보다는 수행을 하고 돌아오라고 말했다. 화실 식구들에게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1만 5000장씩 거리에서 크로키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막은 모른 채 스승의 명령을 하늘처럼 받든 제자들은 '고향 앞으로 가'를 단행했다. 사실 1만 5000장 크로키라는 것이 단시일 내 가능하지 않은 수치이고 보면 스승은 제자들이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부산으로 내려가 크로키에 돌입한 박봉성에게 거리 크로키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다가 후에 그림 하나에 15초씩 하루 약 160장을 그릴 수 있게 됐다. 이 우직한 제자는 한 톨 의심도 없이, 오직 타고난 성실성으로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미친 듯 그렸기 때문에 입맛도 없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62㎏ 정도 나가던 몸무게는 58㎏으로 급감했고 몸은 허약해졌으나, 그림에는 자신을 가졌다.
인체와 옷주름, 근육표현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부산에 온 지 석 달 반 만에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완수한 박봉성은 1만 5000장의 종이를 등에 짊어지고 화실에 도착했다. 깜짝 놀란 스승은,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그때서야 진실을 토해냈다. "지금은 너희들을 받을 수 없다." 방출된 그는 홀로서기를 해야만 했다.
마침 결혼을 구실로 아내까지 자동 제대해 양쪽 다 벌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피맺힌 도시 빈민의 생활을 하면서 초라한 사진관에서 사진 한 장 찍는 것으로 결혼식을 올린 건 아이가 둘 생긴 1980년에나 가능했다.
박봉성은 어느 날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하고 폐결핵 말기 판정을 받았다. 거리 크로키를 한답시고 무리를 한 게 원인이었다. 폐에 구멍이 두 개나 난 사람에게는 100m도 머나먼 길처럼 느껴졌다.
더구나 원고를 만들어 출판사에 들고 다녀도 퇴짜만 맞았다. 그는 동료와 술을 마시며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며 신세한탄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약을 먹고 등산을 하며 나름대로 몸조리를 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재기할 기회를 마련했다.
▧연상의 여군 장교와 결혼하다
박봉성의 인생 이력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군대에서 만난 두 살 연상의 여군 장교와 6년의 동거 끝에 결혼한 것이다. 지금이야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1970년 초반에는 박봉성 커플의 나이나 신분 차이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었다. 고난의 끝이 어딘가를 시험해 보려는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박봉성의 젊은 시절은 질풍노도의 물결 위를 걷고 있었고, 스승에게 받아들여질 때처럼 결혼 역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살 연상의 여군 장교와 6년 동거 끝에 결혼이라는 운명은 박봉성이 부산 군수사령부에서 사병 생활을 하면서 싹텄다. 그는 부대 내에선 군계일학이었던 그림 실력으로 차트일을 전담했는데, 1972년 3월 훗날 아내가 될 권복녀 여군 중위가 그의 부대로 부임해 왔다. 5개월 후 제대를 앞둔 말년병장 박봉성은 혼자서 일을 다부지게 처리하는 권 중위의 모습에 반했다.
그러나 신분의 벽 때문에 내부에서 감히 티를 낼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기회가 찾아왔다. 6월 무렵 권 중위가 서울 육군본부로 다시 발령을 받았고,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권 중위에게 "이 곳을 떠나면 나중에 누가 제일 기억에 남을 것 같으냐"고 묻자, 권 중위는 상큼한 미소와 함께 박봉성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마도 그 때가 젊은 시절 가장 순탄하게 일도 풀리고 행복했던 순간이던 듯싶다.
박봉성은 자신감을 얻었다. 권 중위에게 부대 근처 다방으로 꼭 나와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은 담을 넘어갔고, 헌병의 감시를 따돌린 채 다방에서 만나 편지를 한 차례 주고받으면서 확신을 얻었다. 부산 구덕운동장뒤편 공원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를 하며 첫 키스를 주고받았다. 둘 다 너무 서툴러 이빨이 부딪히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후 그들에겐 진짜 사랑이 싹텄다.
제대한 그는 서울의 육군본부를 찾아가 당당하게 권 중위와 데이트를 했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양가의 반대가 불을 보듯 뻔했다. 권 중위 집안에선 별볼일 없는 만화가 지망생이 달가울 리 없었고, 박봉성의 집안에서도 군인 출신 며느리를 껄끄러워했다. 집안의 반대에다 무일푼이었던 두 사람은 1974년 8월 미아리 달동네에 자리한 그의 자취집에서 전격 동거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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