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판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칼바도스를 아십니까? 어쩌면 마셔보았느냐는 물음이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서 주인공 라비크가 마셨던 술 이름입니다. 소설 속에서 칼바도스는 전쟁, 복수, 저주, 죽음 등 부정적이고 무거운 분위기로부터 라비크를 구출해주는 상징처럼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며 "어른이 되면 꼭 마셔봐야 겠다"고 몇 번이고 되새기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칼바도스는 사과로 빚은 아주 하급 꼬냑으로 원산지인 프랑스에서는 거의 마시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제 기억속에는 조국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망명생활을 그나마 지탱해 주던 오아시스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칼바도스 아니 <개선문>을 읽은 것은 고교시절 이니까 지금부터 20년 전입니다. 사춘기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을 어루만져주던 헤세, 도스트예프스키, 톨스토이, 이광수, 김동리, 김소월의 문학작품들은 모두 제 호주머니 안에 있었습니다. 호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고 가벼운 책 문고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마셔보지도 못한 술 칼바도스를 앞세웠습니다.
▲ 아직도 내 책꽂이에 남아 있는 문고판 두 권. ⓒ2003 이상윤 호주머니에 쏙 들어간다고 해서 포켓북, 소형책자를 전문으로 발행했던 미국 출판사 이름을 따서 펭권북으로도 불린다는 문고판 서적에 대한 기억을 지금의 30대 이상 세대들은 누구나 갖고 있을 것입니다. 쏘냐, 카추샤 같은 이국 소녀들을 만나고 정임, 순임 같은 오누이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인간, 사랑, 구원 등 원초적인 문제에 대해 처음으로 자문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일부 내 삶의 지표로서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사춘기 소년이라면 헤세의 소설을 읽으며 이건 분명 내 이야기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텐데 골트문트, 데미안, 한스 등 소설에 등장하는 또다른 "나" 역시 문고판으로 만났습니다. 300원, 500원 정도하던 문고판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많이 읽히지는 않습니다.
한질에 10만원이나 하는 장편소설이 인기를 끌고 교과서보다 좋은 종이에 멋진 삽화가 곁들여진 책들은 1, 2만원을 훌쩍 넘겨버리는 세상에 4, 5백원짜리 문고판을 거론하는 게 웬지 억지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문고판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문화 코드였던 게 엄연한 사실이고 언제나 목말랐던 문화 욕구를 다소나마 채워주는 역할에 충실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했던 문고판 출판회사들 가운데는 삼중당이나 범우문고 같은 전문회사도 있었고 재벌이 출연한 곳도 있었는데 삼성문화재단에서 발행한 문고판을 읽었던 기억도 있습니다. 물론 돈을 벌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값싸게 양서를 공급하려는 뜻이었겠지요.문고판의 급격한 퇴조는 80년대 후반부터가 아닌가 생각하는데 잘은 모르지만 저작권도 문제가 된 것 같고 높아진 국민소득도 시험지 종이에 인쇄된 책의 인기도를 떨어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서점에 들려보니 문고판이 아직 서가의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다양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문고판을 읽는 독자는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서점의 제일 좋은 위치에 자리했던 그 시절의 문고판과는 대접이 다르더군요.얼마전 미국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시간이 남아 공항서점에 들렸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진 문고판(미국사람들은 펭귄북이라고 한답니다)이 여전히 서가의 앞쪽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드니셀던처럼 아직까지 활동하면서 고액의 인세를 받을 수 있는 작가들의 책이 즐비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 문고판이 한참일 때도 수 십 년 전에 타계한 작가의 작품이나 외국 고전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미국에서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인기작가의 책이 저렴한 문고판으로 팔리고 있어 부러웠습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책을 읽자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매월 추천도서를 선정하기도 하고 도서관을 세우자는 켐페인도 하고 있는데 값싸게 읽을 수 있는 문고판의 부활 운동을 한번 시도하는 것은 어떨까요? 단지 지난 시절의 향수로만 돌리기에는 문고판 서적으로 거둘 수 있는 문화 효과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이상윤 기자 (justdust@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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