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운동의 진원지, 광주민중항쟁

14일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5만 여명이 연출한 감동적인 촛불시위는 미군범죄와 반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이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미 대사관을 향해 행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인식의 변화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IMG1@분명히 반미운동은 8・90년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반미는 재야와 학생운동세력만의 구호가 아닙니다. 또한 그 동안 지배세력의 논리였던 "반미=좌경용공=사회불순세력"이라는 구태의연한 도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와 관련해 오마이뉴스 권박효원 기자는 <반미, 그 때를 아십니까 - 반미운동의 "어제와 오늘"...광주항쟁에서 두 여중생사건까지>라는 기사에서 "지금 한국사회에서 "반미운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을 했습니다.
미선이・효순이 문제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려 있고 또 미군범죄와 반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급격하게 변해 가는 지금, "반미운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로 반미운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해 볼 수 있게 하는 자리를 마련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를 통해 8・90년대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아가면서도 외롭게 반미를 외쳐왔던 운동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내리고, 지금의 반미운동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광주학살의 총 연출자, 미국반미를 얘기할 때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또 많은 피의 대가로, 미국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반미의식이 고조되었다면 왜 그랬는지, 또 미국은 광주학살을 어떻게 연출했는지 그 흔적을 찾아보고자 한다.
박정희가 사살되었던 1979년 10월 26일 이후부터 1980년 5월 17일 계엄 확대까지의 "서울의 봄"은 군사독재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정권장악을 둘러싸고 위기가 심화되어 가던 시기였다. 군사독재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느냐, 아니면 민주화세력이 민주정권을 수립하느냐의 문제로 위기가 심화되던 때였다. 쉽게 말해 독재와 민주의 갈림길에 있던 시기였다.
@IMG1@이러한 위기는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으로 폭발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를 대신해 새로운 군사독재를 위해 등장한 전두환 패거리와 전체 민중의 민주화 요구를 대신해 그에 저항한 광주민중 사이의 유혈 무력충돌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계엄군과 맞서 싸워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고, 전두환 패거리는 광주에서의 학살을 통해 총칼의 무서움을 과시하며 군사쿠데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한편 한국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한국의 군사작전권을 가지고 있는 미군 사령부는 광주의 시민들을 구해 자유와 민주주의의 숭고함을 지키고 계엄군의 학살만행을 저지하려 했을까? 아니면... 애초부터 미국은 전두환 패거리를 통해 군사독재정권을 연장하려 했을까?미국의 대한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합사령관 존 위컴 장군과 글라이스턴의 말속에서 우리는 미국이 어떤 일을 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한국의 10월사태(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사살 사태)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에서 가장 성공한 거사 중의 하나는 전두환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우리의 보람도 크다."(1980년 8월 27일 <AP통신>과의 기자회견에서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의 발언)"(미국은) 한국 국민을 대신하여 한국 국민이 어떠한 형태의 정부를 갖게 될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었다."(1987년 11월 미공보관 기자간담회에서 글라이스턴의 발언)죽인 것은 한국인이지만, 지시한 것은 미국이다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광주학살을 연출했을까?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기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자.전두환 패거리가 12・12쿠데타로 시작해 정치 권력의 핵심을 장악해 가고 있던 80년 5월, 학생들은 군사쿠데타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연일 가두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학생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 행정부가 한국의 민주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최소한 민간정부 수립을 목표로 전두환 패거리의 정치 개입을 저지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기대가 순진했던 것임이 판명 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5월 13일과 14일에는 "코프 제이드 80Ⅱ"라는 색다른 한미연합훈련이 있었다. (정규적인 한미합동훈련은 팀 스피리트이다.) 목적은 "한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며, 내용은 "후방으로부터의 물자 및 병력 지원을 차단하는 훈련, 실무장 투하훈련, 공중정찰, 탐색, 그리고 구조작전이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980년 5월 13일)@IMG2@즉 이 훈련은 적의 침략에 대비해 수비와 공격을 함께 수행하는 전쟁연습(팀 스피리트)이 아니라 후방에서의 대규모 시위, 폭동, 민중봉기 등의 사태에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기 위한 실전훈련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내부준비를 하고서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진압을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미국은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일본과 함께 합동훈련을 실시하면서 군함 6척과 E3A공중조기경보통제기 2대를 출동시켰다. 이것은 일각에서 생각하듯 북한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그리고 당시 광주민중항쟁의 지도부가 믿었듯이 자신들을 응원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항쟁의 동향을 파악해 그것을 계엄군에게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여의치 않을 경우 직접 광주를 짓밟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군사작전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군사작전권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이다. 미국 관리들도 미국이 광주민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20사단의 부대이동을 "승인"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는 시위진압과 안보작전을 위해 몇몇 지상군 부대를 한미연합사 통제로부터 해제해줄 것을 요청했으며 연합사령관 존 위컴은 이 요구를 승인(grant)했다."(<아사히신문> 1985년 5월 17일)반미운동의 진원지, 광주민중항쟁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가면을 벗고, 한국 민중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으며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세웠다.
무엇보다 광주민중항쟁은 피의 대가로 미국의 정체를 명확히 폭로해 내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대량학살도 서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민주주의의 수호자, 영원한 혈맹으로 각인되었던 미국에 대한 인식은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통해 그 본질이 폭로되었고, 광주민중항쟁은 이후 반미운동의 진원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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