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첫 사랑 가을 남자

황종원 2002. 10. 27.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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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첫사랑 순이가 보고 싶다. 다만, 마음에 담아 놓을 뿐.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 지갑에 순이의 흑백 사진을 넣고 다니며 찾지 않는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족한 것. 이제 순이는 손주까지 보았을 나이. 첫사랑은 열 여덟 순이였지. 지금의 순이는 아니다. 첫사랑은 내게만 있지 어떤 여자에게 내가 첫 사랑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동문 모임에서 한 친구가 내게 여자 이름을 말하며 전화를 걸라고 한다. 기억 속에 헤매다가 찾고 보니 대학 1학년 때 친구가 소개하여주었던 친구의 초등학교 여자 동창이었다. 도봉산의 따뜻한 봄 자락에서 찍었던 흑백 사진 속 그네 모습이 어렴풋하였다. 다른 기억은 아지랑이처럼 아슴하다. 친구가 전화 걸라 하기를 그동안 여러 차례였다. 나는 그 때 마다 웃음으로 넘겼다. 꼭 한 번 전화 연결을 하라는 그네의 부탁이 있다며 이번에는 친구의 채근이 대단하다.

흔히 지방 초등학교의 동창들은 모임을 자주 한다. 그 모임에서 그네는 친구에게 지갑 속 그네와 함께 찍은 내 사진을 보여주며 어디 있는지 알면 꼭 연락을 해달라고 했다고 하였다. 청춘 시절, 행여 그네에게 무슨 상처를 주지 않았었는지. 37년간 지니고 지금도 지갑에 넣고 다니는 청춘의 모습에 그녀가 연연하는 이유가 안타깝다.

전화를 걸었다. 너무 낯선 아낙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예의를 차려 말을 건네나 그녀는 초등학교 동창생과 통화라도 하는 양 허물없이 말을 튼다.

무슨 할 말이 떠오르지도 가슴이 떨리지도 않는다. 몇 마디 대화에 아이들이 몇 명이냐 하는 가족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내 말을 놓는다. 나는 짜증스러워진다. 초등학교 동창도 아니고 대학 1학년 때 말 놓고 만난 사이였는지 조차 기억에 없고 말을 틀만큼 정다움도 없는 데.파릇파릇 봄 내음보다 걱실걱실 그녀의 태도가 기억 속에서 문득 떠오른다. 지갑 속에 남자 사진을 품고 다닌다는 마음은 첫사랑 연정인지. 내게 있어 그녀는 첫사랑이 아니라 지워진 얼굴, 지워진 이름이었다.

그리움은 그리움만으로 풍요롭다. 대학 1학년 때 만났던 그네는 지나치게 열혈 여자이다. 그 때도 그네의 그런 태도가 싫어 싫다는 말 대신 침묵의 이별을 택하였을 것이다. 여자는 한 번 만나자 하고 그러마 하지만 나는 기약을 하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 그네를 소개하였던 친구가 진지하게 묻는다. "만날 약속을 했냐"며. 약속이 있을 리 없다. 나는 그네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그때 그 청춘은 아니다. 그네는 지나간 세월과 함께 청춘의 모습을 꿈꾸는지 모른다.

내게 기억은 백지장이 된 지 언제였는데. 그네는 함께 하였던 장소와 대화를 그리움을 가지고 추억을 할 것이나 내게는 망각의 여로이다. 첫사랑은 가슴속에 끌어안고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가는 그리움이 아닌가.아직도 소녀의 마음을 가진 그네는 첫사랑을 그리워하고, 나는 이제 가을 남자가 되어 다시 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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