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촌을 매일 보며 등교하는 학생들

채혜선 2017. 12. 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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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생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바라본 모텔촌. 네온사인 불빛이 그대로 보인다. 채혜선 기자.
#1. 경기 성남 성남여자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A(16)양은 "학원을 가려고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 하는데 모란역 주변은 생각만 해도 무서운 곳"이라고 말한다.

#2. 모란역 인근 성수초등학교에 근무한 적 있는 B씨는 "아이들이 모텔 사이를 지나다니며 등·하교를 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경기도 성남에 위치한 풍생고등학교의 밤 풍경은 여타 고등학교와는 조금 다르다. 하얀 형광등 불빛이 밝게 빛나는 풍생고등학교 맞은 편에는 붉은빛이 가득하다. 모텔촌 수십 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풍생 중·고등학교 인근 모텔촌 주변. 채혜선 기자
풍생고등학교는 남학생들로만 학생이 구성된 남고다. 풍생고 바로 옆에는 남중인 풍생중학교가 있다. 성남 지역 학생들 사이에서는 '풍생고 학생들은 야자를 할 때 교실 밖 창문만 바라본다'는 풍문이 꽤 오랜 기간 전해져 내려온다고 한다. 야자를 하던 학생들이 고개를 들어 창문을 보면 모텔들의 네온사인 불빛들이 저절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나온 우스갯소리인 것으로 보인다.
풍생 중·고등학교 정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보이는 모습. 채혜선 기자
풍생 중·고등학교 정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보이는 모습. 채혜선 기자
지하철 8호선 모란역에서 수진역에 이르는 1㎞ 구간에만 모텔 50여개가 줄이어 늘어서 있다. 특히 풍생 중·고등학교의 경우 학교 정문 앞 약 80m 부근에 바로 모텔들이 즐비해 있다. 자연스레 청소년들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성남시 학교 주변 유해환경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자 2012년 '청소년문화혁신위원회'(청문위)가 발족해 학교를 에워싼 모텔촌과 유흥업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해 당사자인 학생들이 직접 나섰다. 2012년 1기 활동 때는 거리에서 서명 운동을 받았으며, 2013년 2기 활동 때는 학교 주변 유해업소 반대 UCC를 제작했다.

분당선 야탑역 광장에서 청문위가 캠페인 설문조사를 벌였다. [자료 제공 김선태 팀장]
지금까지 청문위의 활동은 이어지고 있다. 다만 5년째 계속되는 활동에도 뚜렷한 성과는 아직 없다.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인식 개선 등과 같은 극히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김선태 금광청소년문화의집 운영팀 팀장. [사진 경기도 블로그]
이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김선태 금광청소년문화의집 운영팀 팀장은 활동에 있어서 어려운 점으로 법률적 문제를 꼽았다. 현행 학교보건법은 학교 정문 앞 50m까지를 절대정화구역, 주변 200m를 상대정화구역으로 정해 유해시설의 설치를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풍생 중·고등학교 주변은 도로 폭이 50m를 넘는 데다 200m 안 구역은 관할 교육청의 심의만 거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김 팀장은 "학교보건법만으로 판단하게 되면 풍생중·고등학교같이 큰 대로 건너편에 모텔이 즐비한 학교의 학생들은 법적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풍생 중·고등학교 인근 모텔촌 주변. 채혜선 기자
모란역 일대. 채혜선 기자
또 풍생중·고등학교 주변 모텔들은 법률 적용 전에 만들어진 모텔이 많아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했다. 학교가 생기기 전에 들어선 유흥업소의 경우 영업을 취소할 만한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이 지역은 과거 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한 숙박촌으로 조성되면서 수많은 모텔이 들어서게 됐다"며 "법률 적용 전에 만들어진 곳들이 많아 제한을 받지 않는 것 같다. 이미 너무 굳어져 재산권에 대한 고려가 더 큰 우선순위가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청문위가 작성한 '학교 주변에 위치한 유해업소의 실태 분석과 바람직한 청소년문화를 확립하기 위한 방법에 관한 연구' 청소년 논문에 따르면 당시 설문에 응한 성남시 청소년 52%는 학교 주변 유해업소에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 성남시 청소년들이 학교 주변 모텔 등 유해업소에 이미 익숙해져 버렸다는 뜻이다.

[자료 제공 김선태 팀장]
김 팀장은 "이재명 성남시장은 2014년 지방선거 출마 당시 모란 일대 러브호텔 용도전환지원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며 "그러나 지금 달라진 것은 현재 그 지역에 1성급 관광호텔 하나가 들어선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여전히 풍생 중·고등학교 앞에는 모텔들이 즐비하고 대낮에도 그곳을 이용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된다"며 "성남시는 장기적인 도시계획을 세워 청소년에게 무해한 환경을 조성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학교 주변에 유해업소가 아닌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마련됐으면 한다"며 "학교보건법 개정을 통해 유흥업소와 학교 정문 사이에 가시거리가 확보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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