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들어온 AI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불편한 다정함'

백수경 2026. 9. 2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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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돌아올 수도 있다.

내가 궁금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고, 상대의 경험담까지 들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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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토라는 남자>가 떠올리게 만든 것... 이번 추석엔 기꺼이 비효율을 선택하려 한다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백수경 기자]

▲  오토에게 앞집 이웃 마리솔이 밝은 미소로 말을 건네고 있는 영화 스틸컷.
ⓒ 소니 픽쳐스
추석을 나흘 앞두고, 대청소와 명절 음식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며 OTT에서 영화 <오토라는 남자>(2023)를 다시 틀어놓았다. 사람을 귀찮아하는 한 남자가 나오는 영화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오토는 정해진 규칙대로 하루를 살아간다. 조용하고 흐트러짐 없는 생활이 그에게는 편하다.

그런데 앞집으로 이사 온 마리솔 가족이 자꾸 그의 일상에 끼어든다. 주차를 못 한다며 도움을 청하고, 사다리를 빌리러 오고, 음식을 나눠주겠다며 말을 건다. 오토가 원한 것은 조용한 하루였지만, 이웃은 자꾸 그 하루에 틈을 만든다. 귀찮고 번거롭다. 이상하게도 그 번거로움이 오토를 다시 사람들 사이로 이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이웃의 크고 작은 일에 관여하면서 오토의 일상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원래 이런 비효율이 스며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물었는데 상대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내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가 돌아올 수도 있다. 필요한 것만 딱 묻고 답을 얻으려 했는데 어느새 한참 수다를 떨고 있을 때도 있다.

효율만 따진다면 굳이 필요한 과정은 아니다. 문득, 그 '옆길'이 관계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사소한 일에서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소고기 청경채를 볶다가 간장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헷갈렸다. 예전 같으면 자연스럽게 전화기부터 들었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AI에 묻고 있는 나,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  명절을 앞두고 다듬고 있는 청경채.
ⓒ 백수경
"이거 간장은 얼마나 넣어야 해?" 사실 꼭 전화까지 할 만큼 어려운 질문은 아닌데, 그 질문 하나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곤 했다. "요즘 잘 지내?", "아이는 학교 잘 다녀?", "이번 명절엔 뭐 해?" 레시피를 묻다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러다 한참 수다를 떨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고민도 비슷했다. 특히 예비 중학생인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복잡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할 때도 많았다. 오히려 "우리 아이도 그랬어"라며 상대의 경험담을 듣다가 대화가 끝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다. 요리를 하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이제는 AI를 켠다. 아이 문제로 고민이 생겨도 마찬가지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정리해달라고 한다.

여행을 갈 때도 그렇다. 예전에는 여행을 다녀온 사람에게 "거기 가보니까 어때?"라고 물었다. 낯선 곳에서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했다. 지금은 여행 일정부터 AI에게 물어본다. 어디를 가면 좋을지, 동선은 어떻게 짜면 되는지, 아이와 함께라면 무엇을 더하고 뺄지까지 빠르게 정리해준다. 편하다. 무엇보다 상대의 시간을 빼앗을 일이 없다. 늦은 밤에 물어도 되고,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해도 괜찮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예전엔 사람에게 묻던 것들을, 이제는 AI에게 묻고 있다는 것을.

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너무 편해서였다. 사람에게 물으면 이야기가 종종 옆길로 샌다. 내가 궁금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을 때도 있고, 상대의 경험담까지 들어야 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한다. AI는 다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빠르게 정리해준다. 바로 그 '옆길'에 내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번 추석엔 비효율을 택해보련다

사람에게 물었기 때문에 들을 수 있었던 경험, 묻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안부, 그리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시간을 내어주던 순간들. 레시피를 물었지만 결국 안부를 나눴고, 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하루를 나눴다. 어쩌면 우리가 얻은 것은 답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답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말을 걸었지만, 그 과정에서 관계까지 얻었던 것이다. AI가 인간관계를 대신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AI로 정보를 얻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내게도 어느새 일상이 됐다. 문제는 AI를 쓰느냐 마느냐가 아닐 것이다. 너무 편리해진 나머지, 사람에게 말을 걸 이유까지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피지컬 AI가 우리의 일상에 더 깊숙이 들어온다면 어떨까. 집안일을 돕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움직임을 보조하고, 곁에서 대화까지 나누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혼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웃의 문을 두드릴까. 사다리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냥 얼굴이 보고 싶어서 찾아갈까. 명절 음식을 이웃집에 정으로 건네주듯, "이번 명절엔 어떻게 지내?"라고 묻고 싶어서 전화를 걸까.

어쩌면 AI가 발전할수록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켜야 할 것은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이번 추석엔 나도 조금 다르게 해보려 한다. AI에게 근사한 명절 인사말을 부탁하기 전에,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 생각이다. 딱히 물어볼 게 없어도 괜찮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다. 예전처럼 별것 아닌 질문 하나를 건네고, 그 질문이 어디로 흘러갈지 잠시 기다릴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토라는 남자>에서 오토의 일상을 바꾼 것도 거창한 사건이 아니었다. 자꾸 문을 두드리던 이웃이었다.

귀찮고 서툴고, 때로는 그의 계획을 망쳐놓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토의 삶에 자신들의 시간을 조금씩 내어주었다. 이번 추석엔 나도 그런 이웃이 되고 싶다. 효율적으로 안부를 묻는 대신 조금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정확한 답을 얻는 대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조금 번거로운 참견도 한 번쯤 할 작정이다. 이번 추석엔, 굳이 시간을 내어주는 그 비효율을 선택해보고 싶다.
▲  오토를 향해 이웃 마리솔이 창문 너머로 아이가 그린 가족 그림을 보여주는 영화 스틸컷
ⓒ 소니 픽쳐스

덧붙이는 글 | 명절을 앞두고 독자들과 따뜻한 정과 공감대를 나누고 싶어 작성한 글입니다. 다른 매체에 송고하거나 게재하지 않은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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