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통장 사라졌다…제삿날 터진 대구 김씨 3대의 비밀
나원정 2024. 9. 17. 07:27
화제의 가족 영화 ‘장손’
부산영화제 3관왕 수상
대가족 3대 비밀‧거짓말
감독 “20살에 할머니 여의고
가족 갈등서 데뷔작 착안”
부산영화제 3관왕 수상
대가족 3대 비밀‧거짓말
감독 “20살에 할머니 여의고
가족 갈등서 데뷔작 착안”
“성진이 왔다, 에어컨 켜라.”
한여름 제삿날, 불앞에서 부침개 부치던 만삭의 손녀딸 미화(김시은)가 그렇게 덥다고 할 때는 들은 척도 않던 할머니 말녀(손숙). 서울에서 장손인 막내손자 성진(강승호)이 오자마자 태세를 전환한다. 며느리‧딸들이 제사상 차리는 동안 집안 남자들은 맥주병 기울이며 화투장 돌리기에 여념 없다.
이어 가을, 갑작스러운 말녀의 장례식. 부둥켜안고 통곡하던 가족들은 이내 말녀의 사라진 통장을 놓고 옥신각신한다. 동네 할머니들은 말녀가 맡아둔 곗돈을 찾아달라고 하고, 말녀의 맏딸이자 성진의 큰 고모 혜숙(차미경)은 투병 중인 남편 병원비를 위해 말녀에게 맡긴 돈이 있다고 나선다.
11일 개봉한 영화 ‘장손’(감독 오정민)은 대구 시골마을에서 두부공장을 하는 가부장적인 김씨 집안 3대의 가족사에 우리네 근현대사 격류를 새겨낸 작품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 오정민 감독이 각본을 겸한 장편 데뷔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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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데뷔작 '장손'서 아시아 거장 보인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KBS독립영화상‧CGK촬영상‧오로라미디어상),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 수상하며 “제사와 장례식이라는 낯익은 풍경을 통해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공감할 가족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렸다”(오로라미디어상 심사평) 등 호평 받았다. 올해 초청된 멜버른국제영화제에선 대만 감독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2000),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1994) 등 아시아 거장들의 가족사 걸작에 비견됐다. 전통적인 한국 가족의 풍경을 깊이 있게 담아낸 솜씨는 이두용 감독의 ‘장남’(1985),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 등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다.
영화는 아름드리 고목이 100년 넘게 지켜온 질박한 시골을 무대로 그림 같은 김씨 가문 한옥의 구들장을 하나씩 들춰보듯 가족사의 비밀과 거짓말을 드러낸다. 가마솥 두부 제조법, 모시 저고리, 누빔 두루마기 등 전통 방식을 고집해온 할아버지 승필(우상전)과 현대식 두부 공정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아들 태근(오만석),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꿈꾸는 손자 성진의 갈등이 다른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뒤엉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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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살림 도맡는 장녀, 부모 재산은 남동생 몫
첫 장면은 자욱한 수증기가 두부 공장 내부를 한 치 앞도 안 보이게 가득 메우며 시작한다. 김씨 가족의 상황을 은유한 장면이다.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거치며 승필이 혈혈단신 일군 작은 두부공장은 이 가족에게 먹고살 방도이자, 세상의 전부다. 그러나 영화 일을 하는 Z세대 성진은 가업을 이을 생각이 없다. 어느 제삿날, 그런 속내를 폭탄 선언한 성진에게 태근은 배신감마저 내비친다. 삼 남매 중 외아들인 자신은 법대까지 나왔지만 민주화 운동 중 다리를 다치고 낙향한 뒤 아버지 승필의 뜻대로 두부 공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태근 곁에서 누나 혜숙도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장녀로서 남편과 함께 공장 살림을 살뜰이 챙겨왔지만, 공장은 남동생 태근 몫이 돼버린 데다, 혜숙의 남편마저 자식이 없는 부부가 친아들처럼 여긴 조카 성진의 졸업식에 참석하다 그만, 사고를 당해 병석에 누운 지 오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상경해 수완 좋은 사업가 남편을 만나 베트남 이민을 앞둔 성진의 작은고모 옥자(실제 부부 배우인 정재은‧서현철이 옥자 부부를 연기했다) 외에 고향에 남은 가족들은 모두 제각각의 울화를 누르며 사는 처지다. 가족 전통이란 명목 하에 숨죽여온 해묵은 갈등이, 말녀의 장례식, 사라진 통장을 도화선 삼아 활화산처럼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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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이 흥미로운 건,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주변 인물이나 구경꾼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부 공장에 관심 없는 성진을 제치고 공장을 운영하길 원하는 누나 미화 부부, 시누 혜숙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시부모 재산이 혜숙의 남편 병원비로 나가는 게 내심 못마땅한 성진의 엄마 수희(안민영) 등 각자의 입장이 몰입감 있게 그려진다. ‘쪽바리, 빨갱이’ 원망을 입에 달고 사는 승필에게도 감춰온 삶의 비극이 있다. 관객이 어느 각도로 보든 자신의 처지를 대입할 만한 인물 군상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집안 비밀 눈뜬 손자, 그렇게 K장손 될까
‘장손’이 흥미로운 건, 가족 구성원 중 누구도 주변 인물이나 구경꾼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두부 공장에 관심 없는 성진을 제치고 공장을 운영하길 원하는 누나 미화 부부, 시누 혜숙과 가깝게 지내면서도 시부모 재산이 혜숙의 남편 병원비로 나가는 게 내심 못마땅한 성진의 엄마 수희(안민영) 등 각자의 입장이 몰입감 있게 그려진다. ‘쪽바리, 빨갱이’ 원망을 입에 달고 사는 승필에게도 감춰온 삶의 비극이 있다. 관객이 어느 각도로 보든 자신의 처지를 대입할 만한 인물 군상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새하얀 눈이 세상을 뒤덮은 새벽, 자신이 평생토록 짊어져 온 밥줄과 핏줄의 무게를 성진에게 쥐어준 승필은 흐린 정신으로 산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간다. 뒤늦게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된 성진이 승필에게 건네받은 건 어쩌면 지금껏 가족의 모든 갈등을 해결할 열쇠다. 모두를 옭아맸던 구습을 끊어낼 힘도, 집안 특혜를 독차지하는 ‘K장손’이란 모종의 담합 속에 구습을 이어갈 선택권도 모두 성진에게 달려있다. 할아버지가 훌훌 털고 떠나간 무게를, 손자 성진은 어떻게 짊어져 나갈까. 영화는 그 답변을 관객 각자에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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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크레디트로 이어지는 이 마지막 7분 남짓 롱테이크엔 “지긋지긋하지만, 애정의 대상인 나의 1세대(할아버지 세대)를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하는 오 감독의 고민이 담겼다.
7분 롱테이크 "애증의 1세대 안녕 고해"
엔딩크레디트로 이어지는 이 마지막 7분 남짓 롱테이크엔 “지긋지긋하지만, 애정의 대상인 나의 1세대(할아버지 세대)를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하는 오 감독의 고민이 담겼다.
오 감독은 “20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모르고 있었던 가족 간의 갈등이 시작된 데”서 ‘장손’을 착안했다. “그땐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집집이 그런 비밀이 없는 집이 없었다. 가족 안에 대한민국 역사를 담을 수 있겠구나, 좀 더 보편적 이야기로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면서 “관객이 극장을 나서며 자신의 가족을 돌아본다면 연출자로서 큰 기쁨일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장손’은 “겪고 나면 그저 풍경 같은 우리 인생”(서현철)을 “마치 불로 태우고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가듯”(차미경) 낯설게 되 비춰본 영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시작할 때는 제목에서 예상한 것처럼 시작하고 끝날 때는 당신의 기대보다 더 멀리 갈” 영화라고 촌평했다.
최고령 손숙(80)부터 막내 강승호(31)까지 폭넓은 연령대 배우들의 맛깔 나는 사투리 열연도 묘미다. 12세 관람가.
‘장손’은 “겪고 나면 그저 풍경 같은 우리 인생”(서현철)을 “마치 불로 태우고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가듯”(차미경) 낯설게 되 비춰본 영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시작할 때는 제목에서 예상한 것처럼 시작하고 끝날 때는 당신의 기대보다 더 멀리 갈” 영화라고 촌평했다.
최고령 손숙(80)부터 막내 강승호(31)까지 폭넓은 연령대 배우들의 맛깔 나는 사투리 열연도 묘미다. 12세 관람가.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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