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용기를 준 말, "이 세상에 유가족다운 건 없어"

유정 2024. 10. 1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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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유가족이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를 읽고

올해는 참사가 일어난 지 10년째 되는 해이자 진실을 밝히는 피해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지 10년이 된 해다.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온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은 그 10년을 두 권의 책에 기록했다.하나는 '기억과 약속의 길'을 걸어온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의 10년을 담은 <520번의 금요일>, 다른 하나는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이다.책이 출간된 후 세월호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청년 유가족들이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를 함께 읽기 위해 만났다. 그 자리에 함께했 던 유정 님께 이 책을 읽은 마음에 대해 물었다. 유정 님은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연주 님의 언니다. <기자말>

[유정]

나날이 짙어가는 동생의 빈자리 때문인지 '520번의 금요일'을 버틴 세월호 가족들을 생각해서인지 책을 앞에 두고 가슴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9주기 기억식에서 동생에게 쓴 편지를 덤덤하게 읽어 내려가는 영수 님의 모습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대답 없는 동생에게 편지를 쓰기까지, 그 편지를 덤덤하게 읽기까지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책을 읽으며 더욱 힘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월호참사 당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중간고사를 마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저는 친구의 콘서트 티켓 예매를 도와주기 위해 학교 앞 피시방에 있었습니다. 티켓팅 전, 시간이 남아 인터넷에 접속했다가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되었으나 전원 구조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친구들과 안도의 한숨을 쉰 기억이 생생합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다시 접속한 인터넷 기사에는 혼란스러운 내용만 가득했습니다. 저 역시도 한동안 뉴스에서 나오는 '에어포켓'에 희망을 품기도 했었고 친구들과 시청에 마련된 합동분 향소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세월호참사는 처음으로 겪은 사회적 참사이자, 타인의 죽음에 눈물 흘리고 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참사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9년 뒤 2023년 4월, 세월호참사 합동분향소에 조문을 가던 고등학교 2학년의 저는 그때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이태원 참사 분향소를 지키는 유가족이 되었고 뉴스에서만 보던 투쟁의 현장에서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캡사이신 물대포는 없었지만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는 그 어떤 살상 무기보다 더 쓰라린 상처를 남겼습니다.

함께 우는 법을 배우고

▲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세월호 생존자, 형제자매, 그 곁의 이야기> 표지 ⓒ 온다프레

"저는 아직도 파도나 바다 형상을 보는 게 힘들어요."

지난 5월, 대학로 4.16연대에서 세월호참사의 형제자매들과 만나 이야기하던 중 동영 님의 동생 채영 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세월호참사가 그랬듯이 이태원 참사는 제 가족의 안온한 삶을 일순간에 붕괴시키고 다시는 손쓸 수 없도록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이태원 참사 2주기를 앞둔 저 또한 여전히 사람이 많은 지하철이나 길거리를 지나가는 것이 긴장되고 두렵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거리유세를 하는 후보자 주위로 많은 사람이 몰리는 걸 볼 때나 시청역 근처에서 발생한 사고로 TV 아래에 빨간 자막의 속보가 나올 때처럼 사소한 일상의 요소들이 자극제가 되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저는 살아있었다면 저와 같은 사회인이 되었을 친구들 생각에 <다시 봄 이 올 거예요>(2016년 4월에 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이 펴낸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 이 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유가족과 생존자로 살아내던 이들의 외침을. 피해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애쓴 그 몸짓을. 그저 뉴스에 나 올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나 내가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뉴스에 나오는 참사 피해자가 된 지금, <다시 봄이 올 거예요> 속 이야기는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로 이어져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저에게 위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마치 책이 "그래도 괜찮아. 나도 그랬어", "세상에 유가족다운 건 없어.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당당해도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해와 공감에 기반한 솔직한 이야기는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고 또 하루를 버티어낼 용기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함께 웃는 법을 배웠습니다

▲  2023년 10월 29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10.29 이태원참사 1주기 시민추모대회가 열리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책을 덮은 저는 사회적 참사를 겪은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처방은 '정신건강의학과의 약이 아닌 위로와 공감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이태원 참사 2주기를 떠올렸습니다.

1주기 추모대회를 통해 많은 시민께서 보여주신 위로와 연대는 저희 유가족들이 2023년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얼어버린 분향소를 녹여주었습니다. 2024년의 겨울도, 앞으로의 겨울도 그리고 우리가 함께 겪을 여러 번의 봄도 결코 누군가에게 외로운 계절로 남지 않기를 바라며 이제 대한민국의 사회적 참사에 쉼표 대신 마침표를 찍는 시간이 오길 소망합니다.

앞으로의 봄과 가을에도 함께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천 송이 꽃을 놓는다고 해도 네가 걸었을 앞날보다 아름다울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떠난 가족의 빈자리는 누구로도 채울 수 없고 그리움은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참사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이에 대한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10월엔 4.16생명안전공원이 착공되고 10.29 이태원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가 원활히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자식의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일, 유가족이 길바닥을 기며 진상규명을 외치는 일, 삭발을 하며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애원하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끝으로 책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세월호참사의 형제 자매분들과 생존 피해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또, 언제나 유가족 곁에서 귀중한 기록을 남겨 주시는 작가기록단의 작가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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