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날... 세상엔 아직도 '김복남들'이 있다
[김성호 평론가]
불이 났다. 공장이 밀집해 있던 미국 뉴욕 맨해튼 그리니치빌리지의 고층 빌딩이었다. 8층 원단기계에서 시작된 불은 이내 9층으로 번졌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는 8층부터 10층까지를 공장으로 쓰고 있었다. 화재가 시작된 8층에 있던 회계사가 처음 상황을 인지하고 10층에 있던 공장주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어떤 조치도 없었다. 10층의 공장주와 관리자들이 빠져나갔단 것을 제외하고는.
1911년 3월 25일, 애쉬빌딩에서 발생한 화재사건은 한 세기가 넘도록 미국 역사상 손꼽히는 화재참사로 기록돼 있다. 사망자만 146명, 부상자도 70여명에 이르렀다. 희생자 대부분은 여성으로, 123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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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스틸컷 |
| ⓒ 스폰지이엔티 |
그러나 이들의 책임 하에 있던 노동자들에겐 대피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잠겨 있었던 때문이었다. 뜨거운 불길로 비상계단이 무너지고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자 상당수 노동자들이 고층에 갇힌 꼴이 됐다. 고립된 이들은 창밖으로 몸을 던지거나 질식해 숨졌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참사는 여성 결집의 기폭제가 됐다. 1908년 1만5000여 명의 여성이 거리로 나와 근로여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을 당시에도 주력은 섬유노동자들이었다. 여성들의 집단적 행동은 참정권 요구 등 정치적 평등권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졌고, 그를 기념하는 취지로 제정된 것이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인 것이다.
화재참사는 그저 어느 한 업체의 개별적 문제가 아니었다. 계급과 성별, 공적 시스템의 외면이 불러온 예고된 참사였다. 피해는 가장 약한 자, 생산직 노동자에게, 그중에서도 여성 및 청소년에게 집중됐다.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가 비상계단을 잠근 행위는 그저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약자를 감금하고 길들여 노동력을 착취하는 행위가 세계 곳곳에서 각기 다른 양상으로 거듭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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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포스터 |
| ⓒ 스폰지이엔티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한국 영화사에 기록할 만한 작품이다. 김기덕 감독의 조감독 출신으로 이 영화를 통해 장편 데뷔한 장철수의 작품으로, 다른 어떤 영화와도 차별화되는 색채를 가졌다. 각본부터 그를 풀어가는 방식이며 메시지까지가 하나하나 새롭다. 잔인한 장면연출에도 독립영화치고는 상당한 관객인 16만 명을 모은 데는 이 영화가 가진 특별한 매력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영화는 여섯 가구, 아홉 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섬 무도를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서울의 은행에서 일하는 해원(지성원 분)이 휴가를 맞아 어릴 적 잠시 지냈던 무도를 찾으며 시작된다. 무도엔 옛 친구 복남(서영희 분)이 결혼해 자식을 기르며 살고 있다. 복남은 섬을 찾아온 해원을 반기지만, 다른 주민들의 시선에선 어딘지 불편한 기색이 흐른다.
처음 며칠은 나쁘지 않다. 복남의 배려 속에서 도시에선 맛볼 수 없었던 휴식을 취하는 해원이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지나며 상황이 전과 달리 보이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섬에서 생활하는 복남의 상황이, 그 불편한 이모저모가 해원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시댁의 구박 속에서도 억척스레 농사를 짓고 가계를 꾸리는 여자로 알았던 복남의 삶은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남편 만종(박정학 분)은 수시로 복남을 구타하고 대놓고 술집 여자를 사서 성매매를 한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상황은 훨씬 심각하다. 시동생 철종(배성우 분)이 만종의 묵인 아래 형수인 복남을 수시로 강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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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스틸컷 |
| ⓒ 스폰지이엔티 |
복남의 지옥 같은 삶은 고립된 섬이란 특수성과 그곳에서 벗어날 길 없이 남편인 만종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선택처럼 강요된다. 복남이 받는 고통 중 상당수가 사실상의 범죄행위며 범법행위로부터 비롯된 것임에도 섬 안에서만큼은 문제를 제기할 방도가 마땅찮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배하는 권력관계, 개입하지 않고 심지어는 조장하기까지 하는 방관자들, 공권력의 책임방기까지 더해져 복남이 스스로의 상황을 감내하도록 한다.
그런 복남에게도 마음을 붙일 곳이 있으니 다름 아닌 딸 연희(이지은 분)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연희 또한 복남과 얼마 다르지 않은 삶을 살 것이 확실한데도 복남은 감히 그를 개선하려는 생각을 쉽게 하지 못하니, 이는 영화 속 섬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영화 밖 남성들이 만든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투표권도, 노동자로서의 정당한 대우도 갖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일해온 여공들의 모습과 얼마 다르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연희의 죽음과 입을 모아 그를 은폐하는 섬 사람들, 나아가 이를 조사하기 위해 육지에서 온 서 경사(조덕제 분)가 이것저것 받아챙긴 뒤 사건을 무마하는 과정을 거치며 완전히 다른 장으로 전환된다. 방관자가 방관을 넘어 불의에 동참하고, 책임 있는 자마저 제 역할을 포기하고 약자를 돌보지 않는 순간, 피해자는 폭도가 되는 일 말고는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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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스틸컷 |
| ⓒ 스폰지이엔티 |
한편으로 영화는 최악으로 치닫는 상황 가운데서도 연대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하여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성매매 여성인 미란(채시현 분)이 위험을 무릅쓰고 복남에게 탈출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모습이 그렇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에 가장 가까운 해원은 나름의 역량과 기회를 가졌음에도 미란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이 또한 영화가 흔히 선택하는 무책임한 희망 제시와는 다른 선택이 아닌가.
여러모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은 특색 있는 작품이다. 부조리한 현실의 구조를 장르물 가운데 반영한 사실부터 섣부른 희망 대신 엄존하는 절망을 드러낸 선택까지가 그렇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폭력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 영화가 과연 현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당신이 그저 운이 좋을 뿐이라고 나는 답하고 싶다.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고용주 등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는 오늘이다. 숙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거처를 제공해 죽거나 병드는 이도 부지기수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언론이 이를 보도해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잠깐일 뿐, 정부와 지자체는 근본적인 변화며 적극적 감독을 하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가 과연 복남이 살았던 무도와 다른가. 2025년 국제 여성의 날에 다른 어떤 영화보다 먼저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 모두는 너무 불친절하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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