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조선정부에 요구한 27개조 폐정개혁안

이윤영 2024. 12. 1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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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대서사시, 모두가 하늘이었다 44] 수운 최제우 선생 탄신 200주년, 동학농민혁명 130주년, 동학! 들불처럼 타오르다

[이윤영 기자]

▲ 동학혁명기념관 1894년 5월 31일(음4.27) 동학혁명군 전주성 점령을 기념, 1994년 동학혁명1백주년을 기념하여 천도교인 성금과 정부지원금 등으로 '동학혁명기념관'을세웠다.(1994년 12월에 기공, 1995년 5월 31일 동학농민군 전주입성일을 기념, 기공식 및 개관식을 하였다.) 본 기념관 원래 명칭은 '동학혁명100주년기념관'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전봉준 대장이 홍계훈 대장에게 일갈한 첫마디는, '우리 동학군의 기포는 만백성을 위한 당당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무슨 더 할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랬다. 만백성이 살기좋은 나라를 위해 동학은 일어섰다.」

임금에게 올린 27개조 폐정개혁안

전봉준 총대장은 지도부와 협의하여 전주성전투인 완산대회전을 마무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지도부 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휴전 조건으로 요구할 내용을 협의하여 홍계훈 대장에게 보냈다. 전봉준은 '우리 동학군의 기포는 만백성을 위한 당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관군이 성안에 쏘아댄 대포와 불화살 때문에 많은 양민들이 피해를 입었고 경기전 등이 파괴되었다.'는 서두를 시작으로, 임금에게 전해줄 것을 요구하는 27개조 개혁안을 함께 보냄으로써,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하였다.

〱27개 조 폐정개혁안>
1. 조세 양곡의 뱃길 운반을 담당하는 전운소(轉運所)를 없앨 것.
2. 결세 장부에 올린 토지의 국결(國結)을 더하지 말 것.
3. 보부상들의 폐단을 금할 것.
4. 도 안의 환전(換錢)은 이전의 감사가 거두어 갔으니, 민간에게 다시 징수하지 말 것.
5. 대동미를 상납하는 기간에 각 포구 잠상(潛商)의 미곡 무역을 금할 것.
6. 군대에 입대할 장정들에게 징수하는 동포전(洞布錢)은 각 집마다 봄가을 두 냥씩으로 정할 것.
7. 탐관오리들은 모두 파면시켜 내쫓을 것.
8. 위로 임금을 속여 관작을 팔아 국권을 조롱하는 자들을 모두 직위에서 파면할 것.
9. 각 군현의 수령들은 자기 관할 지역 안에서 장례를 치르지 말고, 또 논을 거래하지 말 것.
10. 논밭에 부과하는 조세는 전례를 따를 것.
11. 백성들의 각 집에 부과하는 잡역을 줄일 것.
12. 포구의 어염세를 없앨 것.
13. 보세(洑稅)와 궁답(宮畓)은 시행하지 말 것.
14. 각 고을에 수령이 내려와 백성들의 산지(山地) 문서를 빼앗아 강제로 묫자리를 쓰지 말 것.
15. 왕의 명령으로 파견되어, 양전(量田) 사무를 총괄하고 진황지의 개간을 독려하는 균전어사(均田御史)를 혁파할 것.
16. 각읍의 민가가 모인 곳에서 파는 물건들에 푼돈을 매겨 갈취하는 것과, 매점매석하는 도고들을 혁파할 것.
17. 수확이 없어 조세를 면제받아야 할 땅에 억지로 부과하는 백지징세와 나라에서 개인에게 조(租)를 받을 권리를 준 개인 소유의 논밭과 묵은 논밭에 징세하는 일을 중단할 것.
18. 대원군을 국정에 관여토록 해서 민심을 제대로 반영시킬 것.
19.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진고(賑庫)를 혁파할 것.
20. 전신사무관청인 전보국(電報局)이 민간에 대해 폐해가 크니 혁파할 것.
21. 각읍 관아에서 필요한 물건들은 시가대로 사서 쓰도록 할 것.
22. 각읍의 아전을 돈을 받고 임명하지 말고 쓸 만한 사람을 고를 것.
23. 각읍 하급 관리들이 큰돈을 축냈으면, 그자를 처형하고 친족들에게 징수하지 말 것.
24. 오래된 사채를 수령이 끼고 억지로 거두는 것을 모두 금단할 것.
25. 동학도를 무고히 살육하는 일들이 없게 할 것이며, 동학과 관련되어 갇힌 이들은 모두 신원하여 석방할 것.
26. 중앙과 지방관청 사이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는 향리와 각 감영과 고을 사이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는 아전에게 급료로 주는 쌀은 과거의 예에 따라 삭감할 것.
27. 각국 상인들이 포구에서 장사를 하므로, 한양 시장에는 출입을 금지시키고 함부로 아무 곳에서나 행상하지 못하도록 할 것.

그때는 5월 5일이었다. 동학군의 27개조 개혁안을 받아 본 홍계훈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전령에게 '성안에 가서 동학당에게 무기를 반납하고 성문을 열어 해산하라고 전하라.'고 전했다. 홍계훈은 동학당 해산 명령을 전한 즉시 전주성 4대문 밖 주변에 방문을 내다 붙였다.

『목숨이 아깝거든 성문을 열고 나가라. 우리는 추격하지 않을 것이며, 또 각 지방 수령들에게 알려 해치지 않도록 하겠다. 그러나 끝내 버틴다면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섬멸할 것이다.』

홍계훈의 전언과 방문 게시를 시작으로 전봉준과의 심리전이 시작되었다. 전봉준은 5월 6일 홍계훈에게 전령을 보내어 '전주성에서 철수하고자 하나 돌아가는 길에 공격을 당할까 염려된다.'며 신변 안전 보장을 요구하였다.

홍계훈은 '해산하는 자들에게는 해치지 않는다는 통행허가증표인 물침표(勿侵表)를 준다.'는 것으로 신변 보장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은 정부가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실천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약속하기 전에는 철수하지 않는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동학군의 최후통첩을 받은 홍계훈은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려 대답을 구하였다. 이에 대해 조정은 전라감사에게 '화해와 협상의 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 전주성점령도 한들 송만규 화백이 그린 '전주성점령도'이다. 고부, 무장, 백산에서 출발하여, 황토현, 황룡촌 전투 등, 전주성 점령까지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2차 동학농민혁명 즉 일본군에게 학살 당한 그 현장까지 담아내고 있다. 전주성점령도는 동학혁명1백주년을 기념하고 또 동학혁명기념관 개관 기념 작품으로 귀중한 그림이다. 본 그림의 원본은 현재 동학혁명기념관에 전시중이다.
ⓒ 동학혁명기념관
청나라 차병론은 다시 등장하고

한편 조정에서는 대신회의를 열어 청나라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조정 대신들 대부분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영준과 청나라 사신 원세개는 비밀리에 청군의 파병을 성사시켰고, 원세개는 북양 대신 이홍장에게 청군이 즉각적으로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출 것을 건의하였다.

홍계훈의 급보는 병조판서 민영준을 통해 지난 4월 12일 고종에게 직보되었다. 대신회의에서 대신들이 백성들의 동요가 우려된다며 반대하여 청군 차병론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이튿날 4월 28일에 병조판서 민영준은 또다시 청군 차병론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원로대신 김병시는 국제정세를 들어 청군의 개입을 반대하고 나섰다. '동비들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우나, 그들도 우리 백성이니 관군으로 토벌함이 마땅하다. 만약 청군의 차병이 이루어지면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조정에 등을 돌릴 것이다.

일본군이 중국과 일본 사이의 톈진조약(1885)을 들어 청·일의 세력 균등을 명분으로 조선에 진출할 것이 분명하여 염려를 아니 할 수가 없다. 청나라 공사관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 출병을 멈추게 하고, 관군은 물론 각처에서 민보군이 동참하고 있으니 그 결과를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까 한다.'였다.

원로대신 김병시와 여러 대신들의 반대와 신중론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결국 4월 29일 민비의 주장과 민영준의 제의를 받아들여 원세개를 통해 청나라 군대의 파병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가 청에 파병을 요청한 조회문(照會文)은 이러하다.

『우리나라 전라도 관내인 태인·고부 등지의 민심은 흉하고 사나우며, 성정은 험하여 본래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요사이 동학 교비(敎匪)와 부합,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아 현 군읍 십여 곳을 함락하고 이제 또 북상하여 전주영부를 함락하였습니다.

정부는 앞서 훈련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고 달래는 데 힘썼으나, 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맞서 싸우니 군대는 패하고 대포 등 무기도 많이 잃었습니다. 이런 흉흉한 소요가 오래 갈까 특히 염려될뿐더러 더욱이 한양과의 거리는 4백수십 리밖에 되지 않아, 저들이 북상하게 내버려둔다면 한양까지 휩쓸려 손해 보는 바가 많을 것입니다. 새롭게 훈련된 우리 조선의 병력은 겨우 한양을 호위할 정도이고, 또 전투 경험도 없어 흉악한 도적을 소탕하기 곤란합니다. 이런 일이 진척되면 청국도 피해를 입을 수 있으므로 귀 정부에 걱정을 끼침이 클 것입니다.

임오·갑신 두 변란 때도 청국 군대의 진압에 힘입었는데, 이번에도 그때 일을 참작하여 귀국 총리에게 청원하는 바이니, 신속히 북양 대신에게 전보를 쳐서 군대를 파견토록 해 주십시오….』

조선 정부가 나라의 형편과 국가 운명의 치부를 청국 정부에게 과장하여 드러내는 태도야말로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망국의 길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조선 정부는 결국 스스로 자신을 묶어 남의 나라에 바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학진, 정부를 대신하여 협상하라

홍계훈은 조정의 명을 기다리며 전봉준에게 전령을 보내어 최종 담판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때 조선정부에서는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정부를 대신하여 전봉준 총대장과 협상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 청군, 일본군 상륙 청나라와 일본군 상륙. 1894년 5월 5일(음) 청군이 아산만에 상륙하였고, 일본군도 5월 6일부터 인천항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 동학혁명기넘관
조정이 이렇게라도 전향적인 자세를 보인 것은 5월 5일(음) 청군이 이미 아산만에 상륙하였고, 또한 일본군도 5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인천항에 상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정부는 안으로 동학당의 전주성 점령과 밖으로 청군과 일본군의 각축이라는 내외우환(內外憂患)에 직면해 한시바삐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주성을 차지한 동학농민군과 완산에 포진한 관군연합군 간의 전투는 황토현 대회전, 황룡대회전에 이은 전주완산 대회전(大會戰)이었다. 전주성 전투가 길어짐에 따라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곧바로 서울로 향했어야 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물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와 긴 행군 등 지칠 대로 지친 동학군이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한양을 친다는 전략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민주자치시대를 연 집강소 폐정개혁의 혁명적 성과도 이뤄냈다. 그러나 결과론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일본군에게 동학군 섬멸에 대한 준비시간을 제공하였고, 관군연합군이 일본군에 편입되어 일본군 지휘를 받는 등 척왜항전 즉 동학의병전쟁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게 되는 결과를 맞이했다. 그래서 훗날 동학농민혁명을 평가할 때 전주성 점령 직후 한양직행 불발에 많이들 아쉬워하곤 한다.」

덧붙이는 글 | 이윤영 기자는 동학혁명기념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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