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 학생이 서울에서 학교 다닌 방법 [정진동 평전]
정진동을 아십니까. 농촌선교(1958~1971)에서 도시산업선교(1971~2004) 활동까지, 정진동은 충북 지역 민주화운동의 어른이었습니다. 정진동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가 꿈꿨던 공동체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의 소중함, 민중해방의 사상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전동역에서 기차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는 정진동의 가슴은 희망에 부풀었다. 작년 말 청주 고등성경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는 그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역에서 내린 그는 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에서 운영하는 '대한신학교' 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대문구 서소문동에 있는 신학교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요한복음 3장 16절
다른 과목은 자신 있었는데, 영어가 걱정이었다. 어떤 문제가 출제 될 지 모르지만 분명히 성경 구절에서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무작정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구절을 암송하기로 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다행히 합격이었다. 그런데 입학금이 문제였다. 청주 성경고등학교 다닐 때도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 노동을 통해서 자력으로 수업료를 해결한 터였다. 대한신학교 야간부 역시 수업료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우선은 입학금이 목전에 달렸다. 그는 여동생들과 함께 짠 가마니와 깊은 산속에서 해 온 나무들을 장에 팔아 장만한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장만한 논 세 마지기도 있었다. 부모님과 여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논 세 마지기와 송아지 한 마리를 팔아 입학금을 충당했다.
급한 불을 끄니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생활비와 학기 중 들어갈 수업료가 걱정이었다. 수업이 야간이었기에 주간에는 무조건 일을 해야 했다.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그는 일자리 찾기 대작전에 들어갔다.
▲ 정진동의 졸업사진. |
ⓒ 단국대학교 |
그는 동대문에서부터 용산까지 걸으며 주변에 있는 공장과 회사들의 간판 이름과 주소를 메모했다. 일주일간 미친 듯이 걸어 다니며 메모하느라 기진맥진했다. 그리고 방바닥에 엎드려 편지를 썼다.
"본인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주경야독하기 위해 야간 신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소사(학교나 관공서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이)도 좋고 아니면 청소부, 화부라도 좋으니 일자리가 있으면 선처해 주십시오. 배움에 목말라 이렇게 애쓰는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22세의 청년 정진동은 애끓는 심정을 편지에 담아 길거리에 나섰다. 일주일간 다니며 공장과 회사, 상점의 주소를 적기는 했지만 우푯값이 없다 보니 자필로 쓴 편지를 공장과 상점 편지함에 꽂았다.
그러고는 매일 교회에 나가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좋은 직장에 취직해 일하는 상상을 하며 혼자 빙그레 웃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편지를 우편함에 꽂은 지 10여 일이 지났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었다. 아침부터 막노동판을 다녔다. 장작 패는 일터, 연탄 찍어내는 일, 사이다 박스 만드는 공장, 건축 현장 등 수십 곳을 다녔다. 거의 2개월간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용산 경찰서 앞을 지나가다 우연히 동양제빙 공장 건설 현장을 발견했다. '또 안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십장(일꾼을 직접 감독하는 우두머리)을 만났다. "당신 막노동할 수 있어?" "예. 시키시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십장의 질문에 정진동이 답했다. "내일 아침 8시부터 나오라"는 희소식을 접했다.
어렵게 얻은 작업장에서 처음 시작된 일은 우물을 파고 높이가 150cm 되는 노깡(토관)을 땅 아래로 깊이 묻는 일이었다. 우물의 깊이는 12개의 노깡을 묻어야 했으니 18m였고, 직경은 4m였다.
정진동을 포함한 8명의 노동자가 동시에 우물에 들어가 흙을 팠다. 그런 후에 단계적으로 노깡을 묻었다. 그러다 우물 속의 발동기가 정전이 돼 노깡 옹벽에 전류가 흘렀다. 모두가 감전돼 죽을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을 간신히 넘겼다.
이어진 작업은 30m 높이의 물탱크에 페인트를 칠하는 일. 이런 고된 작업으로 오후 5시 30분부터 하는 야간부 수업을 2시간 뒤늦게 들어갔다. 결국 친구들이 대리출석을 해줬고, 2시간 분량의 학습은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야 했다. 이러기를 3개월 하니 제빙공장 작업도 끝났다. 다시 실업자 신세가 됐다.
죽음과 맞바꿔
다시 일자리를 찾은 곳은 용산 삼각지에 있는 미군 부대였다. 처음에 유리 절단공을 모집해 무조건 응했는데, 사실은 정진동에게 그런 기술이 있을 리 만무였다. 그렇지만 무작정 손을 들었다. 정작 일을 시작하기로 한 날 현장에 가니 "취업 공고를 잘 못 냈다"며, 풀 깎는 노동자를 구한다고 했다. 정진동은 십년감수했다. 유리를 한 번도 절단해 보지 못한 그가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풀 깎는 것은 시골에서 늘 해 왔던 일이기에 '누워서 떡 먹기'였다.
정진동을 포함해 12명이 한 조가 돼 1954년 6월부터 일을 시작했다. 풀 깎는 기계가 없던 당시는 미군 부대 주변에 자라나는 모든 풀을 낫으로 깎아냈다. 그런데 그는 일을 하면서 동료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다.
일을 하다 보면 미군 부대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 중 재활용이 가능한 물건이 많았다. 기름종이, 유리, 송판, 베니어합판 등이 바로 그것. 미군 부대에 고용된 한국 노동자들은 이것을 주워다가 시내에서 팔아 돈을 챙겼다.
그런데 정진동은 양심상 이 일에 동참할 수 없었다. 마치 도적질하는 것 같아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이 불의(?)한 일에 연루되면 마치 자신이 지옥에 갈 것만 같았다. 그는 그만큼 순진하고 양심적이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동료들로부터 눈총을 샀다.
대신 그는 식당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를 챙겨 인근에 돼지 기르는 사람들에게 갖다 주웠다. 그러면 약간의 돈을 받았다. 사실 이 일도 양심에 찔리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수업료 때문에 억지로 했다.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사고가 났다. 미군이 끌고 온 작은 트럭에 12명의 노동자들이 승차했을 때였다. 정진동은 운전자 옆 발판에 타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차가 급출발을 하면서 추락했다. 모두 정진동이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미군이 정진동에게 3개월간 휴직을 줬다. 그 기간이 모두 유급 처리돼 그해 1년간의 수업료와 생활비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 단국대학교 역사학과 불국사 답사. 1958년 졸업앨범에서. |
ⓒ 단국대학교 |
▲ 단국대학교 전경. 단국대학교 1958년 졸업앨범. |
ⓒ 단국대학교 |
낮의 고된 노동에 이은 저녁의 신학 공부는 지속됐다. 그러다가 1956년에 단국대 역사학과 3학년에 편입학했다. 신앙인으로서 신학 공부는 당연한 일이지만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무리를 해서 단국대학교를 다닌 것이다. 대한신학교 1~2학년 시절에는 주경야독 했다면 3학년부터는 주독야독(晝讀夜讀)한 것이다. 즉 주간에는 단국대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야간에는 대한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것이다.
1956년부터 원 없이 공부를 실컷 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숨 막히는 상황에서 그의 고향 교회인 호죽교회에서 복된 소식이 들렸다. 대한신학교 수업료를 전액 지원해 줄 테니 일요예배를 주관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신학교 4학년 때인 1957년도에 호죽교회 전도사 자격으로 주일에 설교를 했다.
주일을 고향인 호죽에서 보내기 위해서 그는 금요일 신학교 야간수업을 마치고 서울역에서 심야 열차를 탔다. 전동역에서 내려 35리(14km)를 걸었다. 가다 보면 호죽리 못 미쳐 동림산을 넘어야 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야간에 혼자 그곳을 지나는 것은 머리를 쭈뼛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정진동은 조치원역에서 충북선으로 환승해 정봉역에서 내리면 호죽리에 쉽게 갈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갔을까? 즉 경부선 조치원역 한 정거장 전인 전동역에서 내려 14km의 강행군을 했는가 말이다. 답은 차비가 없어서다. 주일 저녁 예배를 보고서는 거꾸로 했다. 호죽에서 전동역까지 걸어서 서울역으로 가는 열차(경부선 상행선)에 몸을 실은 것이다. 그의 서울에서의 신학과 역사학 공부는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였다.
▲ 장로교신학대학 전경. 1961년 장신대 졸업앨범에서. |
ⓒ 장신대학교 |
호죽교회 다음의 목회지는 충북 진천군 덕산교회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교회 청년들이 정진동이 졸업한 신학교를 문제 삼은 것이다. 즉 대한신학교는 예수교장로회(아래 예장) 대신(교단)에서 운영한 신학교다. 그런데 덕산교회는 예장 통합 소속 교회였던 것이다. 자신의 교회와는 다른 교단에서 운영하는 신학교를 나온 이를 목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호죽교회도 똑같은 문제가 있었으나, 그곳은 고향이었기에 특별히 교인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타지인 진천 덕산에서는 문제가 됐던 것이다. 정진동은 교인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흔쾌히 "그러면 '장로교 신학대학(아래 장신대)'을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61년도에 1년간의 과정으로 장신대를 다녔다. 결국 그는 청주 성경고등학교(3년), 대한신학교(4년), 장신대(1년) 3곳을 8년간 다녔다. 그렇게 공부를 하며 그는 누구를 원망하기보다는 신학 공부를 깊고 체계적으로 할 수 있음을 감사해했다.
▲ 장신대 졸업 증서 수여식. 1961.12.21. 영락교회. |
ⓒ 청주도시산업선교회 |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