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아름다운 정원이 사계절 아름답다 [전국 정원 여행]
이 겨울 어디로 정원 여행을 가야할까
전국 정원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든 고민은 어떤 기준으로 방문지를 선정할까였다. 몇 번의 서치 끝에 전국 55개의 식물원 및 수목원이 담긴 지도와 국가 정원(2곳)과 지방 정원(5곳), 그리고 민간 정원(83곳) 리스트를 받아든 나는 아무도 모르는 보물지도를 손에 넣은 아이처럼 흥분하면서도 어느 계절에 어디를 방문하는 게 가장 적절할까 고민이 시작됐다. 한 달에 한 번 떠나는 정원 여행을 단순 꽃구경이나 핫플레이스 방문이 아닌, 언젠가 가꿀 나의 정원 그림을 구체화하고 영감을 얻는 배움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예쁜 화단’이나 ‘잔디 깔린 앞마당’ 정도에 멈춰있는 내 안의 '정원 개념'을 시원하게 확장해 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취향으로 채워진 정원보다 다양한 식물자원을 수집해서 관리하고 연구하며 대중에게 아름다운 휴식 공간을 선사하는 수목원을 먼저 찾아가는 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연의 생태를 이해하고 나무의 식생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어떻게 정원을 디자인하고 가꾸는가, 그 노하우를 엿보고 싶은 마음에 수목원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내가 떠나는 첫 정원 여행 날짜는 마침 2월 중순. 홈페이지 사진은 대부분 화려한 봄날의 정원, 생명력 가득한 여름의 정원, 아름답고 풍성하게 물든 가을 정원 사진이 대부분이라 어디를 가야 괜찮은 겨울 정원을 만날 수 있을지 당최 감이 오지 않았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다 김장훈 정원사가 쓴 <겨울 정원>이라는 책이 있다는 걸 알았다. 와우! ‘겨울 정원’이 이렇게 책을 따로 쓸 만큼 이야기가 풍성한 주제라니. 겨울은 정원이 잠자는 시간 아니었나? 초록을 유지하는 몇몇 상록수 덕에 ‘여기가 정원이구나!’ 이렇게 너그럽게 봐 주는 시간 아니었어? 아는 게 없으니 아무 말 대잔치 같은 생각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나온다. 망설임 없이 <겨울 정원> 책을 주문했다.
아름다운 겨울 정원을 찾아서
<천리포 수목원>을 2월 정원 여행의 방문지로 정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겨울에 둘러봐도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여러 기사에 마음을 빼앗겨서다. 마침 주문했던 책에도 겨울에 찾아가 볼 만한 정원으로 천리포수목원을 추천하고 있었다. 겨울 정원에선 무엇을 봐야 할까. 겨울 정원에서 눈을 부릅뜨면 나 같은 초보도 다른 세계를 볼 수 있을까? 김장훈 정원사는 <겨울정원>에서 ‘모든 생명이 삶의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고요히 숨 쉬고 있는 겨울정원의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산책자에게도 세심하고 특별한 눈길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뭔가 심오한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것 같은 이 느낌적 느낌. 온통 갈색 세상인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 빛을 발하는 식물들이 있고, 곳곳에서 준비되는 새 생명이 있다니 왠지 더 궁금해지는걸. 마침 친구가 명랑한 정원여행 되라며 내가 좋아하는 노란색으로 맨투맨 티셔츠를 선물해줬다. 우와...얼마만에 입어보는 맨투맨인지. 노랑색을 받아드니 갑자기 혈중 명랑농도가 급상승 되는 것 같다. 가벼운 발걸음 되자고 새 운동화도 하나 장착했으니 나는 이제 떠나는거다.
충남 태안군 바닷가에 자리한 천리포 수목원. 입구에 도착하니 로켓처럼 하늘을 향해 뻗은 고산 향나무가 먼저 반겨준다. 어린 시절 국립공원을 방문해 보면 빽빽한 소나무만 가득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나라의 정원 풍경도 많이 바뀌었구나 싶다. 이 고산 향나무는 가드닝 유튜버들의 정원에서 자주 보았던지라 왠지 더 반갑게 느껴졌다.
수목원 입구를 지나 정원에 들어서는데 금빛 억새의 물결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가느다랗고 유연한 잎과 빛을 받으면 반짝이며 빛나는 이삭들이 자칫 황량해 보일 수 있는 정원 초입을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채우고 있었다. 굳건히 자리를 지킨 다른 나무들과는 대비되는 선과 색, 리듬이 시선을 끄는데 역시 앞서가는 수목원은 이미 그라스의 자리가 있구나 싶다. 정원 한가운데로 들어서니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켰을 웅장한 나무들이 친절한 표찰을 달고 맞이해준다. 대중에게 식물과 관련된 지식을 보급하는 것이 수목원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인 만큼 친절히 표찰을 달아주는 건 나 같은 초보 가드너에겐 더없이 고마운 일이다. 목련나무, 호랑가시나무, 너도밤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 향나무..... 단어로는 익숙하지만 실제 모습과 매칭이 안되던 이름들을 입안에 넣고 출석을 부르듯 가만히 중얼거려본다. 안녕, 얘들아.
겨울 정원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2월의 수목원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마치 정원의 골격을 보는 것 같다. 화려한 옷을 벗고 화장을 지운 최초의 모습처럼 나뭇잎을 다 떨궈 수형을 그대로 드러내는 나무, 독특한 수피와 가지의 색으로 정원에 컬러감을 더해주는 나무, 사계절 한결같은 푸른빛으로 생기를 더하는 상록수, 이렇게 멋진 수형이었나 싶게 거대하게 자리 잡은 나무들을 보자니 이 큰 정원의 바탕이 조금 더 보이는 것 같다. 이 바탕 위에 총천연색의 봄꽃이 올라오고, 싱그러운 여름 잎사귀가 무성해지며, 세상 모든 빛깔을 불러 모은 것 같은 가을 풍경이 이어지겠구나. 정원사가 겨울에 진가를 발휘하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는 '식물의 사계절 잘 아는 것부터 시작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 자란 나무의 수형과 크기를 예측하고 함께 식재했을 때 도움이 되는 나무와 꽃들로 정원을 디자인하려면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어마어마한 세계의 문을 열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1만 여종 이상의 수종이 자라고 있다는 천리포 수목원의 다양한 주제정원을 걷는 동안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나무는 고작 수국, 목련, 단풍나무, 동백나무, 참나무, 남천, 낙우송 등 열 종류도 안된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가꿔진 수목원 여기저기를 입을 벌리고 감탄하기에 바쁘고, 아직 통성명도 못한 나무들이 즐비하지만 이름을 모른다고 대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니, 나는 눈앞에 있는 자연 속으로 동화되는 것에 집중하자 마음먹었다. 식집사에서 가드너로 꿈을 확장한 순간부터 자연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닌, 공존의 대상이 되었으니 자연 속에서 감탄하고, 쉼을 누리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타국에서 나무를 심는 가드너의 마음
<천리포 수목원> 곳곳엔 설립자 민병갈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한국으로 귀화한 그의 미국명을 따서 ‘밀러 가든’이라고도 부르는데, 식물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던 그가 우연히 땅을 매입하고 식물에 대한 공부를 이어간 후 본격적으로 나무를 심기까지 8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40년간 수목원을 가꾸는 동안 화학비료와 농약 사용도 줄이고 외형을 제한하는 가지치기도 최소화하며 자연 그대로 수목이 자라도록 했던 밀러는 외국에서 다양한 묘목과 종자를 들여와 지금의 풍성하고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완성했단다. 나무를 심고 가드닝을 하려면 이 정도 마음은 있어야 하는 걸까. 평생을 바쳐 숲을 완성할 각오가 있는 사람들만 도전할 수 있는 일은 아닐까. 땅만 있으면 수년 내에 아름다운 정원을 뚝딱 만들 수 있을 거라 상상했던 내가 왠지 작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나는 수목원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한국의 어디에도 수목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은 너무 가난하여 한국인들에겐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름다운 화초나 여러 식물에 대한 관심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다. 나의 수목원이 정말로 가치 있는 곳이 될지는 미래가 결정할 일이다.”
수목원 중앙에 위치한 민병갈 기념관에서 위의 문구를 읽는데 가난한 한국을 향해 품었던 그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뜨끈해졌다. 내 나라도 아닌 타국 땅에 40여 년간 나무를 심어 가치 있는 미래를 선물하려는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가드너의 삶이란 마당을 가득 채운 꽃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닌, 손톱 밑이 새까매지고, 손가락의 모든 관절이 울퉁불퉁해지며, 허리가 굽도록 나무를 심고 돌보는 일이구나. 보이지 않는 다음 세대를 위해 내 육신을 토지에 갈아 넣으며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구나, 갑자기 현타가 세게 온다. 내가 심은 나무는 누구의 미래가 될까. 몇 십 년 후 나처럼 나무의 사이사이, 정원 구석구석을 거니는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는 날이 정말 오게 될까.
묵직한 책임감을 느끼는 마음 앞에서 정신을 차리자고 ‘STOP’ 버튼을 눌러본다. 묵직한 부담감은 그만. 나는 이제 막 꿈을 꾸는 가드너이니 이런 책임감과 사명감 같은 건 절대 옳지 않아. 그냥 예쁜 꽃 하나 심고 행복해하고, 새로 사 온 나무 하나 심으며 뿌듯해도 되는 '초보 가드너'라고. 웅장한 꿈이나 거대한 사명감 따위는 저 멀리 훌륭한 이들에게 건네고 나는 그저 명랑하게 정원 여행을 이어가야지. 세상은 넓고 가봐야 다녀야 할 정원은 많으니 적당히 아껴가며 감격해야지. 그래도 돌아오는 내내 나무를 심는 밀러 아저씨의 모습이 상상되는 건 어찌할 수 없는 감동 때문인 것 같다. 천리포수목원의 아름다움을 계절마다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전엔 보이지 않던 겨울 정원의 매력과 파란눈의 한국인 밀러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어 참 의미있는 여행이었다.
첫 번째 정원 여행을 하며 느낀 점 두 가지
하나. 겨울 정원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의 포인트가 새로웠다.
둘. 꽃 화분은 그만 사다 나르고, 나무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글쓴이 - 이설아
작가, 글쓰기 공동체 <다정한 우주>리더, 정원이 있는 시골 민박을 준비하는 초보 가드너. 저서로는 <가족의 탄생>,<가족의 온도>,<모두의 입양>,<돌봄과 작업/공저>,<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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