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계의 디바 김수희와 배우로 출발해 가수까지 도전한 신신애.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가요계에 큰 파장을 남겼는데요.
서로의 조력자에서 앙숙으로 변한 이야기를 파헤쳐 볼까요?

김수희는 1970년대 후반 ‘너무합니다’, ‘멍에’를 히트시키며 주목을 받은 가수입니다.
1980년대 대마초 파동에 억울하게 연루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고 복귀했어요.
이후 ‘남행열차’, ‘정거장’ 같은 곡으로 꾸준히 사랑받다가 1993년 ‘애모’로 정점을 찍었는데요.
서태지와 아이들을 꺾고 가요톱텐 골든컵을 수상하며 트로트의 위상을 새롭게 세운 순간이었죠.

한편 신신애는 1977년 MBC 9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어요.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 강한 조연으로 활약하며 이름을 알렸지만, 그녀의 인생을 바꾼 건 드라마 ‘희망’ 속 짧은 노래였습니다.
당시 노래 실력이 제작자 김수희의 귀에 들어갔고, 곧바로 음반 제안이 이어졌죠.
그 결과 1993년, 메가 히트곡 '세상은 요지경’이 탄생한 거예요.

이 곡은 전국을 휩쓸며 신신애를 단숨에 스타 가수로 만들었어요.
KBS ‘가요톱10’에서 4위까지 오르는 등 서태지와 김건모, 신승훈 등 당대 최고 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죠.
그러나 화려한 성공 뒤에는 갈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세상은 요지경’ 수익 배분 문제에서 불만이 터져 나온 것.

당시 가요계는 계약금만 지급하고 음반 수익은 소속사가 가져가는 구조였대요.
하지만 배우 출신이던 신신애는 이를 납득하기 어려워했죠.
결국 연말 시상식 수상 소감에서조차 신신애는 공개적으로 김수희에 대한 섭섭함을 드러내기도 했어요.

양측의 갈등은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는데요.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시대적 관행 탓에 원활한 마무리는 어려웠죠.
한때는 생방송 자리에서 신신애의 폭로성 발언이 나오며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기도 했어요.

결국 두 사람은 결별을 맞았고, 신신애는 배우 활동에 집중하며 다시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는 이후 ‘봄날은 간다’, ‘극한직업’ 같은 영화에서도 짧지만 강렬하게 얼굴을 비췄어요.

김수희는 여전히 트로트의 상징으로 남아 수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죠.
‘세상은 요지경’의 성공과 갈등은 지금도 한국 가요계의 씁쓸한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쉽게 끝났지만,
그로 인해 탄생한 명곡과 이야기들은 여전히 대중의 기억 속에 살아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벌어졌던 갈등까지, 한국 음악사의 선명한 한 페이지로 남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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