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의 독립운동가로 소개된 이유선, 실제 행적은 달랐다
[박종선 기자]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이유선은 <부천시사>와 '디지털부천문화대전'에 소개될 정도로 부천에서는 비중있는 인물이다.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부천대학교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한항길 선생,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근태 의원 등과 함께 근현대인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선의 행적을 살펴보면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자료와 맞지 않은 부분이 많다. 특히 '성서조선역사와 민족 잡지 발간 그리고 강연' 대목은 연대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과 관련하여 그 어디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성서조선사건'은 일제가 1942년 3월 30일에 김교신을 비롯해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성서조선> 집필진과 구독자 들을 검거하고 그 핵심인물들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가 결국 불기소로 1943년 2월 29일 석방시킨 사건을 말한다.
'성서조서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은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1년 동안 미결수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러 독립 유공자가 되었다. 만약 이유선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투옥되고 고문을 당했다면 독립유공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관련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부천시사(2023)'에서 기록한 이유선의 행적과 오류
그는 인천공립보통학교와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구산교회와 구산진영학원을 설립하였다. 3.1운동 이후 그는 일본으로 도항하였다가 1940년에 귀국하여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현재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거주하였다. 1941년에 그는 성서조선과 민족잡지 발간에 관여하고 강연을 한 것을 빌미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선옥(善屋)백화점'을 설립하고 경영하였다.
경기 부천시가 부천시의 역사를 집대성한 <부천시사>(2023)에서는 이유선이 3.1운동 이후 일본으로 도항했다가 20년이 지난 1940년에 부천으로 돌아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1941년 성서조선과 민족잡지 발간에 관여하고 강연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위의 내용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현대사료DB 중 근현대인물자료를 보면 모두 사실과 맞지 않다. 국사편찬위에는 이유선이 1921년부터 농사를 지었고 1931년에는 고향인 구산리에서 진영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40년에 상업에 종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유선은 일본에 가지 않았으며 오로지 부천에서 활동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1921년부터 10여년간 농업에 종사
1931년 九山進英語學院을 設立運營
1940년부터 商業에 종사
이유선의 부천에서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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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1월 13일 매일신보에 소개된 선옥상점과 그 주인 부산유선(이유선)에 관한 기사 부산유선(이유선)을 부내면 구산리에서 진영학원(進英學院)을 설립하였으며, 소년 구장으로 면협의원 등 여러 중요 공직을 맡아 활동하고, 3년전인 1940년 소사에 와서 상점을 운영하여 거장이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
|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선옥상점(善屋商店)
부산유선(富山裕善)씨
부천군의 상업은 국지적으로 상당히 발전되엿다. 소사역전 선옥은 군내 단연 1위의 거상점이니 복장잡화와 포목 등속 문방구 지물류(종이류) 신발류 등 풍부히 구비하야 대도시 상점에 비하야도 손색이 없다. 주인 부산유선씨는 본군 출생으로 고향인 부내면 구산리에서 무산아동을 위하야 진영학원(進英學院)을 설립하얏으며 소년 구장으로 면협의원 기타 중요 공직을 역행하엿스며 생활에 절제와 근검을 역행하야 치산수분하다가 약 3년전 소사에 와서 소사상계의 거장이요 40세의 전도다망한 청년이다. 천성이 인후하고 지략이 출중하며, 상덕이 겸전하야 이 세계에 신의를 두텁게 얻었으니 금일의 성공은 당연한 일이다. 씨는 현재 부천군복장잡화소매상조합 이사장이요, 새로이 창립을 본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조합 이사장으로 추천되엿다(사진은 선옥상점)
1943년 1월 기준으로 3년 전인 1940년에 소사(素砂)에 와서 상점을 차려 거상이 되었으며, 그 전에는 구산리 고향에 진영학원을 설립해 교육에 매진하였고, 소년 구장과 면협의원 등의 공직을 맡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유선은 실제로 1943년에 소사읍회의원이 되었으며, 1944년 1월에 설립된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업조합> 의 이사(理事)가 되었다.
즉, 1940년 이전에는 진영학원을 운영하였고, 그 이후에는 '선옥'이라는 상점을 차려 지역의 유지가 되었으며, 1943년에는 소사읍회의원 그리고 1944년에는 부천군생활필수품소매상조합 이사(조선총독부관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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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년 5월 30일 경성일보 기사 부산유선(이유선)은 1943년에 소사읍회의원으로 이 당선되어 마장충태랑(馬場忠太郞), 부곡평치(富谷平治), 이주용(李宙鏞), 김택양충(金澤良忠-金孝泰), 고산병희(高山炳熙), 고전태작(高田太作), 등산홍덕(藤山弘德), 소견산청삼랑(小見山淸三郞), 조창일부(朝倉一夫), 청수항사(淸水恒司), 원촌상일(元村常一) 등과 함께 당선어례 광고를 하였다 |
| ⓒ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
무엇보다 '성서조선' 사건 기록에서 이유선의 이름은 찾기 어렵다. 아마도 핵심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추측해보면 이유선이 핵심인물이 아니라 구독자로서 경찰조사 정도는 받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일제 경찰은 뚜렷한 증거도 없이 200, 300명에 이르는 <성서조선> 구독자들을 사상범으로 간주하고 압수수색과 장기간의 구금을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유선에 대한 부천시의 기록이 국사편찬위원회가 많이 다르고, 이유선이 부천에서 활동했던 내용도 빈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부천시는 이유선에 대한 행적을 다시 연구하여 부천시민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인신문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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