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못 가져 미안해 네 잘못이 아니야”

김성일 2023. 3. 1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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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이나 행동이 느린 편이라…. 우리 가족들도 저의 그런 모습을 한심해 했는데, 그 친구들 입장에선 더 답답했을 거예요. 처음엔 가벼운 놀림으로 시작하다가 제가 별 다른 반응을 안 보이니 욕을 하거나 머리를 때리는 횟수가 잦아졌어요.”

지난 17일 고등학교 시절 학교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직장인 김현진(가명·33세)씨의 얘기를 듣는 동안 류마티즘, 아토피가 대표적인 ‘자가면역질환’이 연상됐다.

자가면역질환은 우리 몸 속 면역체계가 오작동을 일으켜 정상세포를 적으로 오인해 공격하는 병이다. 학폭도 피해자의 오작동을 유도한다. 폭력을 당한 피해자 중에선 실제로 문제의 요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스로 ‘피해 굴레’를 만들어 쓰는 안타까운 일이 거듭되고 있다. 

◇ 재경험 속 ‘자책’

폭력은 상처, 즉 외상을 입힌다. 학폭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불안, 공포, 두려움과 함께 ‘재경험’을 가한다. 폭력의 기억, 장면이 반복적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것이다. 폭력이 멈춰도 재경험은 이어진다. 

허휴정 인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부모나 학교 등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피해 학생은 홀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며 “폭력과 재경험을 겪으며 가해자를 원망하던 피해자는 시간이 지나면 그 폭력의 원인을 자신에게 묻고 찾곤 한다”고 전했다.    

이어 “내가 너무 약해서, 못 생겨서, 말을 잘 못해서 괴롭힘을 당한다는 자책이 조금씩 커지는 것”이라며 “가해자의 가스라이팅도 그런 마음을 더 심어 넣는다”고 설명했다. 

허 교수는 학폭 경험을 어렵게 토로하는 40~50대 진료 환자들을 자주 마주한다. 아픈 기억을 치유하지 못한 채 사회생활에 나선 사례들이다. 이들은 직장에서도 대인관계가 조심스럽다. 누군가 날선 반응을 보이면 예전 기억이 고개를 든다. 

허 교수는 “한 번 자리 잡은 트라우마는 생애 전반에 걸쳐 위축감을 갖게 할 수 있다”면서 “가해자들에 대한 적법한 처벌, 가해를 방지하는 가이드라인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피해자들은 학교를 떠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하나?’ 등의 고민에 사로잡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 피해자가 건넨 ‘당부’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픔이 길겠지만 영원하진 않으니 삶을 포기하지 말자.”

지난 4일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에 올려진 한 학폭 피해자의 자필 편지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범대 학생이라고 소개한 그는 “저 또한 학폭 피해자”라며 “사건 당시 중학생이었던 저는 가해자들의 괴롭힘, 방관하는 또래들의 무시, ‘네가 문제’라는 담임 교사의 조롱으로 살기 싫다는 생각만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했다.

또 “학교는 지옥이었고, 부모님조차 정서적 환경보다 성적에 더 관심을 뒀다”면서 “울어도 현실이 그대로일 것을 알기에 더 서러웠던 것 같다”며 당시 심정을 전했다. 

가해자가 발 못 들이는 교실, 피해자의 안식처가 되는 교실을 그리며 교육자의 꿈을 꾸고 있다는 그는 “당신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의기소침하지 말라. 폭력에 무너지지 않고 그 다리를 건너온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며 응원의 마음을 담았다.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올라온 자필 편지. 글쓴이는 사범대생으로, 자신의 학교 폭력 피해 사실을 고백하며 또 다른 피해자들을 위한 응원을 편지에 담아 전했다. 에브리타임 캡처

그는 편지를 통해 “당신에겐 아무 잘못이 없다”고 강조했다. 피해자에게 원인이나 문제가 있어 가해를 당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책의 끈을 그만 놓으라는 당부다.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어렵게 도움을 청해도 나아지는 게 없거나 보호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내 편이 없다’는 생각에 정서적으로 무너진다”며 “그런 와중에 자신에 대한 불만이 쌓여간다”고 말했다. 

역시 중학생 시절 심한 학폭 피해를 겪은 바 있는 이 전문의는 특히 피해자들의 ‘사회 불신’을 우려했다. 이 전문의는 “가해자의 경우 적정 수준의 처벌을 받는 게 가능하도록 보호하고, 피해자는 진정 어린 사과와 이차 가해를 막는 예방 조치 등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도록 어른들이 믿음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이 믿음이 피해자가 일상을 회복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며 살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사회적 환경이 된다는 얘기다. 

이 전문의는 “피해자의 불신을 덜기 위해선 처벌과 훈육, 가해·피해 교육, 용서, 화해 등을 모두 별도로 두고 진행해야 한다”며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들은 이 모든 걸 한꺼번에 하려고 했을 때 발생한다”고 전했다. 

김성일 기자 ivemic@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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