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은 매춘부" 이런 혐오 녹인 건, 日아이들 손바닥이었다 [이제는 이민시대]

“게이 워 마이 쯔어거, 마마(이거 사줘 엄마)”
지난달 11일 일본의 수도권인 사이타마 현 가와구치(川口)시에 위치한 ‘시바조노 단지(芝園団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은 일본어가 아니라 중국어였다.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아파트 단지 안 슈퍼마켓으로 엄마의 손을 이끌던 아이 입에서 나온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게에 들어간 이 아이는 “곤니치와(안녕하세요)”라고 일본어로 인사했다.
시바조노 단지는 일본 도쿄에서 지하철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시’인 와라비(蕨)시의 유일한 역 와라비역에서 내려 서쪽 출구로 나와 걷다 보면 중국어 간판을 단 상점들이 하나둘 눈에 띄었다. 단지에 가까워질수록 중국어도 쉽게 들렸다.

아파트 단지 안에 붙어있는 안내문도 특이했다. “비바람이 강하게 불면 창문을 닫아주세요”라는 이 네 줄짜리 안내문은 위 두 줄은 일본어, 아래 두 줄은 중국어였다. 한 아파트, 2개의 언어. 일본인보다 중국인이 더 많이 사는 이 아파트 단지에선 일상적으로 보이는 풍경이다.
도쿄 근교 아파트 단지…주민 절반 이상이 중국인
가와구치 시 통계에 따르면 시바조노 단지 주민이 대다수인 시바조노동의 인구는 총 4618명. 이 가운데 2037명은 일본인이고 2581명은 외국인이다. 총인구 중 외국인 비율은 55.9%로 대부분은 중국인이다. 이곳이 일본 사회의 외국인 수용 인식 변화의 정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으로 유명해진 이유다.
외국인이 많은 곳에서 기존 주민과의 갈등이 발생한 사례는 전 세계 곳곳에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국가 간 다른 생활 습관, 문화 등은 혐오의 불씨가 된다. 지난 2020년 2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막 퍼지기 시작했을 때 중국인이 많이 사는 한국 서울 대림동에서는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식당 출입을 거부하는 등 차별 사례가 잇따랐다. 대구에서는 이슬람 사원 건립을 두고 주민 간 법정 공방이 수년간 이어지기도 했다. ‘이민시대’가 본격화할수록 외국인과의 공존공생이 불가피해지는 만큼 갈등 완화 방안의 마련 역시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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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에게 지배당한 단지”…갈등이 시작됐다
시바조노 단지는 1978년 입주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 단지 같은 15층 높이 건물이 없었다. 지금도 주변 최고 높이를 자랑한다. 1~15동에 달하는 대단지로 상가와 병원 등도 갖췄다. 시바조노 단지 주민자치회 임원 오카자키 히로키(岡﨑広樹·42)는 단지를 함께 돌며 “이곳은 부지만 약 10만 평으로 도쿄 돔의 2.5배에 달한다. 처음 입주한 이들은 ‘좋은 곳에 산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사설 정치·경영사관학교로 유명한 ‘마쓰시타정경숙’ 학생이던 그는 일본 사회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진 일본인·외국인 갈등을 공부하고자 2014년 이 단지로 들어왔다.
본격적으로 외국인이 늘어난 건 1990년 이후였다. 자녀가 성장한 일본인 가정이 이사하면 그 자리에 중국인이 입주했다. 특별히 중국인이 많아진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오카자키는 “외국인이 일본에서 집을 구하려면 일본인의 보증을 요구하거나 이유 없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이곳은 공공기관 성격인 도시재생기구가 관리하는 아파트라 그런 조건은 없는데 이런 장점이 중국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퍼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고 설명했다.

도시재생기구는 일정 소득 기준을 넘으면 외국인에게도 임대한다. 월 소득이 월세의 4배 이상이면 임대를 주는 식이다. 이곳에 사는 중국인 대부분은 IT기업 노동자로 소득 수준이 높다. 오카자키는 “도쿄 도심까지 지하철로 1시간이면 갈 수 있어 출퇴근이 쉬우면서 임대료는 도쿄보다 싼 점도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2009년 8월쯤에는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2000명을 넘어섰다. 당시만 해도 갈등이 적지 않았다. 생활 습관이 다른 일본인과 중국인은 소음과 쓰레기 분리수거 등 문제에서 주로 부딪혔다. 분리수거장에 허가받지 않은 가전제품이 버려져 있으면 누군가 “중국인이 한 짓”이라고 가전제품에 낙서했고, 중국인 입주자는 반발하곤 했다.
“중국인은 매춘부”라던 혐오 녹인 건?

혐오를 녹인 건 학생들이었다. 언론은 통해 소식을 접한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모여 자원봉사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시바조노 단지의 일본인과 외국인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겠다”며 ‘가교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혐오 문구가 가득했던 벤치는 알록달록한 핸드프린팅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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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분단’ 여전…공존 지나 공생 꿈꾼다
다만 아직도 일본인과 외국인이 함께 잘 어울려 지낸다고 표현하긴 어렵다. 2017년부터 이 단지에 살며 『시바조노 단지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을 쓴 아사히신문 기자 오시마 다카시(大島隆)는 본인의 책에서 이 단지를 ‘조용한 분단’ 상태라고 표현했다. 같은 공간에 ‘공존(共存)’할 뿐 ‘공생(共生)’하진 않는단 의미다. 오카자키도 “아직 일본인과 외국인으로 갈라져 있는 게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그는 ‘조용한 분단’의 원인이 국적에만 있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혹시 친구로 지내는 노인이 있느냐”고 물으면서다. 시바조노 단지에 사는 일본인 대부분은 70대 이상 노인이지만 외국인은 아이를 키우는 40대가 많아 접점이 생기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개인주의가 퍼진 현대 사회의 분위기상 주민 화합 정도 자체가 약해진 부분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직접 본 시바조노 단지는 혐오를 넘어 공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직 공생까진 갈 길이 남았다. 오카자키는 “마이너스(-)에서 제로(0) 상태로 가는 데 10년이 걸렸다”며 “우리 세대에서 공생까지 이루려는 마음은 욕심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70대 노인에게 당장 외국인과 공생하라고 할 수는 없다”며 “혐오 만은 다음 세대에 물려주지 않으려는 노력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날 아파트 단지 중심에 있는 ‘타마고 광장’에는 초등학생 무리 8명이 함께 축구를 하고 있었다. 일본 시즈오카에서 이 단지로 이사 왔다는 이음요시(12)는 중국인, 나머지 7명은 일본인이었다. 모두 같은 반으로 그 반 총인원 29명 가운데 3분의 2가 외국인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 친구들과 싸운 적이 있느냐”는 취재진 물음에 한목소리로 “다 친군데, 왜 싸워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오후 4시쯤 타마고 광장을 내리쬐던 해가 저물 즈음 아카리, 미쿠, 카이는 풀밭에 쪼그려 앉아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놀고 있었다. 이음요시도 함께였다. 풀밭에 고개를 박고 한참 열중하던 찰나 이음요시가“찾았다!”라고 외치자 주변으로 우르르 친구가 모였다. “부럽다”를 연발하며 다시 있던 곳으로 돌아가던 카이를 이음요시가 불렀다. 이음요시는 조용히 웃으며 카이에게 네 잎 클로버를 선물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가와구치=이태윤·이영근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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