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이 죽어갈 때 옆방에서도 물고문 있었다

변상철 2026. 4. 1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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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 당한 신미란씨 재심 신청... 재판에서 고문 경관 이름 댔지만 판사는 무시

[변상철 기자]

 2019년 6월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민주인권기념관 예정지(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32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 참가한 학부모와 학생이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 숨진 조사실을 둘러보고 있다.
ⓒ 유성호
1987년 1월 14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취조실에서 스물 두 살 청년 박종철이 차가운 물속에서 생을 마감하던 그날, 전두환 정권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희대의 거짓말로 이 죽음을 덮으려 했지만, 진실은 복도를 타고 세상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촉발하며 역사를 바꿔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시각, 그 남영동 대공분실에 또 다른 청년들이 박종철에 앞서 연행되어 박종철과 같은 고문을 받고 있었다. 자칫 또 다른 박종철이 될뻔했던 이 청년들은 다행히 죽음을 피해 갔지만 그들이 겪었던 고문의 후유증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기자가 단독 입수한 신미란씨의 1987년 당시 수사 기록과 공판 조서에 따르면, 박종철이 죽어가던 그 시각, 같은 층의 또 다른 취조실에서도 똑같은 수법의 비인간적인 물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다. 박종철의 비명이 문틈을 새어 나오던 그 장소에서, 청년 신미란 역시 '조작의 덫'에 걸려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왜 남영동으로 끌려갔나

신씨가 남영동 대공분실의 목표물이 된 이유는 1986년경부터 서울 성수동, 경기도 부천시·시흥시 등 공단 지역에서 노동 야학 교사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학원 자율화 운동 및 직선제 개헌 쟁취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청년 대학생들을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당시 불같이 피어오르던 노동운동과 정권에 대한 불만을 잠재울 표적이 필요했던 것이다.

연행 당시 경기도 시흥시 소재 '작은자리'라는 야학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신씨는 1987년 1월 11일부터 22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은 뒤 '국외 공산 계열의 활동에 동조하여 반국가단체인 북괴를 이롭게 했다'는 내용으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87년 1월 14일의 기록, 박종철이 죽던 날의 압수수색
 박종철이 죽던 그날 남영동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신씨의 자취방을 압수했던 기록
ⓒ 변상철
신씨의 기록 중 가장 먼저 눈이 갔던 것은 바로 압수조서이다.

일시: 1987년 1월 14일 오전 11:00
장소: 경기도 시흥군 소래읍 신천리 자취방
집행기관: 내무부 치안본부 대공3부

박종철 학생이 남영동 509호에서 물고문을 당해 사망한 시각은 1월 14일 오전이다. 비슷한 시각, 대공3부 소속 사법경찰관 이홍길(경위), 정진술(경사)은 신씨의 자취방을 뒤지고 있었다. 박종철이 죽어 나가던 그 어수선한 시점에도 남영동의 '조작 공장'은 멈추지 않고 신씨를 용공 분자로 만들기 위한 증거 수집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박종철에게 가해진 수법과 똑같아
 공판 과정에서 고문을 주장하는 신미란씨
ⓒ 변상철
1987년 5월 12일 열린 제1회 공판에서 신씨와 신씨와 함께 연행되어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은 임00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겪은 지옥 같은 나날을 증언했다. 이들의 진술은 박종철의 사인인 '물고문'이 남영동에서 얼마나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는지를 증명한다.

임00의 증언 "7~8명이 달려들어 물고문을 가했다"

신씨와 임씨는 법정에서 "1월 11일부터 22일까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볼펜 깍지 고문, 구타를 당했다"라고 폭로했다. 특히 "7~8명의 수사관이 내 팔을 뒤로 꺾고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머리를 강제로 처박아 질식의 고통을 겪게 했다"라고 구체적으로 진술했다. 이는 박종철에게 가해진 수법과 똑같았다.

신미란의 증언 "죽여서 생매장해도 모른다 협박"

신씨 역시 수사관들이 "여기는 초헌법적 기관이다. 너 같은 것 하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생매장해도 세상은 모른다"라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그 속에서 조작된 자술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고 울분을 토했다.

박종철 사건의 '은폐 주범' 박병수가 이 사건의 책임자
 의견서의 하단에 수사책임자 박병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박병수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던 수사관 중 한 명이다.
ⓒ 변상철
이 사건에서 더 충격적인 것은 수사 책임자의 정체였다. 이 사건 수사 의견서에는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사법경찰관 경정 박병수'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다.

박병수가 누구인가. 그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 남영동 5층을 총괄하던 과장(경정)이다. 박종철이 사망하자 사건을 축소하고 범인을 도피하게 한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박종철을 물고문으로 죽인 부서의 수장이자 그 범죄를 은폐한 박병수가, 같은 시기에 신씨와 임씨를 간첩으로 몰아넣는 수사 보고서 최종 결재란 도장을 찍은 것이다. 이는 신씨가 겪은 고문이 단순히 몇몇 수사관의 일탈이 아니라, 박병수라는 수장이 지휘한 조직적인 범죄였음을 시사한다.

39년 만의 재심, 박종철의 비명을 복원하는 일
 임씨는 당시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며 진술했다. 그러나 판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 변상철
당시 재판부(재판장 김효종)는 피고인들의 처절한 고문 폭로를 외면하고 신씨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후 김효종 판사는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냈다. 피해자들의 비명은 판결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을 고문했던 수사관의 실명을 폭로했지만 당시 김효종 판사는 이 점에 대해 사실 확인조차 하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랬던 김효종 판사는 후에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물론 신씨 사건의 공적으로 훈장을 받은 것은 아니나, 그의 재판 판결에 흠결이 있던 것이 드러난 만큼 이 훈장의 영예는 그 빛이 바랬다.

이제 신씨는 39년 전 남영동의 진실을 들고 다시 법정에 선다. 박종철이 죽던 그날, 그 장소에서, 그를 죽인 자들에 의해 자신 역시 물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상의 증거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재심의 사유가 되었다.

기록은 영원히 남는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5층 복도에는 박종철의 마지막 숨소리와 신미란·임00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동시에 새어나왔다. 신씨의 재심은 그날의 비명을 잊지 않으려는 기록이자, 아직 끝나지 않은 1987년의 단죄를 향한 서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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