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정책 혼란 사과한 이복현…"은행 알아서" 책임은 넘겼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두 달 가까이 쏟아낸 ‘대출규제’ 발언으로 대출 시장과 소비자가 혼란을 겪은 것과 관련해 10일 공식 사과했다.
이 원장은 이날 서울 중구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18개 국내은행 은행장과의 간담회 직후 기자들과 만나 “가계대출 급증세와 관련해 세밀하게 입장과 메시지를 내지 못한 부분, 국민이나 은행 창구 직원에게 불편과 어려움을 드린 점에 대해 죄송하다”고 밝혔다.
특히 지난달 25일 이 원장이 ‘은행권의 손쉬운 금리 인상’ 질책과 함께 ‘강한 개입’을 선언한 이후 실수요자 피해 우려가 커졌다. 이후 시중은행은 경쟁하듯이 1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중단, 조건부 전세자금 대출 제한, 신용대출 한도 연 소득 제한 등의 방안을 내놨기 때문이다.
이 원장은 이날 급증하는 가계대출에 대한 은행권의 ‘자율관리’를 주문했다. 그는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감독 당국의 가계대출 규제는 기본적으로 준수해야 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며 “은행이 각자의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력한 개입 의지를 드러낸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목소리다. 그동안 금융당국 간 ‘엇박자’에 혼란이 커졌다는 비판을 의식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이 원장의 ‘자율관리’ 발언은 지난 6일 김병환 금융위원장이 대출 정책에 대해 “정부의 획일적 통제보다 은행권의 자율적 관리가 바람직하다”는 입장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원장의 발언에 대해 금융당국은 '뒷짐'을 지고, 은행권의 등을 떠밀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간 오락가락 발언에 시장에 혼란을 주더니, 이번엔 사실상 대출관리와 실수요자 보호에 대한 책임을 은행권으로 넘긴 모양새라서다.
앞으로 은행은 세심한 대출 규제로 가계대출 증가 속도를 줄이는 동시에 실수요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원장은 이날 “주택가격 상승 기대를 전제로 한 자금 등 위험 성향이 높은 대출에 대해서는 심사를 보다 강화하겠다”고 했다. 한마디로 차주의 대출 상환 능력 이상으로 빚을 내 집을 산 투기적 수요를 걸러내는 역할도 은행이 해야 한다는 의미다.
현재 시중은행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다. 연말까지 가계대출 잔액을 가계부채 관리 목표(경영계획)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총량을 관리하지 못한 은행은 내년에 대출 한도가 줄어드는 ‘페널티’를 받는다. 금감원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국민ㆍ신한ㆍ우리ㆍ하나은행)의 연간 경영계획 대비 가계대출 증가액은 지난달 21일 기준 평균 150.3%다.
은행권이 금융당국 눈치 보느라 우와좌왕하는 동안 실수요자의 혼란은 더 커질 수 있다. 실수요자 기준 등 금융당국의 일관된 가이드라인(정책 방향)이 없기 때문에 은행마다 규제를 적용받지 않는 ‘실수요자 예외 요건’을 제각각 내놓고 있어서다.
10일 신한은행은 이날부터 주택 구입 목적의 주담대를 무주택 세대에만 허용한다. 다만 1주택자라도 주담대 실행 ‘당일’에 기존 보유 주택을 매도하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구입 주택 매수 계약서는 물론 기존 주택 매도 계약서를 동시에 제출해야 한다. 신용대출 조건도 일부 변경했다. 최대 연 소득(100%)까지만 내준다고 예고했다가 이날 본인 결혼이나 직계가족 사망, 자녀 출산 등의 실수요자에 한해 소득의 150%(최대 1억원)로 한도를 늘렸다. 지난 9일 우리은행이 주담대ㆍ전세대출 대상을 무주택자로 확 좁혔다가 결혼예정자와 상속인은 세대원이 1주택자라도 허용한다고 대출 정책을 바꾼 이후 두 번째다.
문제는 은행마다 ‘실수요자’를 구분하는 잣대가 다르다. 특히 1주택자의 경우 국민과 우리은행은 기존주택을 1~2년 안에 매도하는 조건으로 갈아타기(주담대) 대출이 가능하지만, 신한은행은 당일 기존 주택을 판 계약자에 한해서 대출이 가능하다. 익명을 요구한 은행권 관계자는 “일관된 가이드라인이 없기 때문에 은행의 대출계획(대출한도)에 따라 실수요자 요건이나 규제 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당수 전문가가 가계대출 규제는 중ㆍ장기적으로 일관되고 세심하게 관리해야 실수요자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하준경 한양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계대출 증가 속도가 가파르게 늘어나고 혼란이 가중됐을 땐 금융당국이 실수요자 기준 등 기본적인 원칙이나 일관된 정책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지현 기자 yj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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