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예수가 피신해 목숨 건졌다는 곳, 여기네요

운민 2024. 9. 2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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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요람,이집트를 가다-3]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수도, 카이로

[운민 기자]

▲ 이집트로 피난온 아기예수가족들 이집트로 피난 온 아기예수 가족들
ⓒ 운민
2024년 8월, 전 세계의 눈이 카이로에 쏠렸다. 근 1년 가까이 진행된 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의 휴전협상이 이 도시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641년 이슬람제국의 장수 아므르에 의해 카이로가 만들어진 이래, 카이로는 이집트는 물론 아랍의 역사에서 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천년고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도시를 처음 찾는 여행객들에게 카이로는 썩 좋은 인상은 아니다. 길을 한발 떼기 무섭게 사방에서 차들이 일제히 클락션을 울려대고, 포장되지 않은 도로에선 흙먼지가 풀풀 일어난다.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여행객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척 접근하는 일도 잦다.

이 도시에 지쳐 피라미드가 있는 나일강 서편이나 남쪽 룩소르, 아스완으로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는 사람도 많지만, 이곳에 며칠 머물다 보면 카이로의 매력에 빠질지도 모른다. 21세기와 중세가 공존하는 이집트의 수도는 도처에서 다양한 시대와 종교를 가진 유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카이로의 중요성
▲ 콥틱교 성경 콥트박물관에 전시된 콥트교의 성경
ⓒ 운민
카이로는 곡창지대인 나일강 삼각주의 꼭짓점에 위치해 그 중요성이 일찍부터 부각되었다. 고대이집트 시기 현재 도시의 남서쪽에는 수도이자 종교중심지인 멤피스가 동북쪽에는 태양신을 모시는 헬리오폴리스란 도시가 우뚝 서 있었다.
이후 이집트를 점령한 로마제국도 이곳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쳐 나일강 동안에 요새를 건설하니, 바빌론 요새라 불리는 이 성채는 훗날 카이로의 기초가 되었단다. 하지만 헬레니즘 이후 비잔틴제국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의 중심지는 늘 알렉산드리아였다.
▲ 바빌론요새 카이로의 역사가 시작된 바빌론요새
ⓒ 운민
이슬람세력이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 조금씩 중심지가 바뀌긴 했지만 수도로서 현재까지 그 의무를 다하고 있다. 이 도시의 자체적인 인구는 천만이지만, 나일강 서편의 기자와 근교 위성도시까지 합치면 2100만이 넘는다.

이 혼돈의 도시에서 어디를 먼저 가야 할까? 카이로의 첫 역사가 시작된 올드카이로부터 그 여정이 시작된다. 도로는 늘 정체되어 있고, 인도와 차도의 경계도 불분명한 이곳에서 지하철이라는 교통수단은 보증이 완벽하다. 대도시의 명성에 비해 다니는 노선은 3개뿐이지만 우리가 갈 올드카이로는 전철로 쉽게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역인 마르 기르기스역에 내리자마자 담벼락 너머로 지붕 위 십자가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집트 어디를 가나 흔하게 보이는 이슬람사원이 아닌 기독교, 이 나라의 전통교회인 콥트교회인 것이다. 서기 65년 신약성경의 마가복음을 저술한 마가(마르코)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이슬람이 도래하기 전까지 이 나라의 대부분은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서방의 가톨릭과 결별하고 콥트교라는 별개의 종파로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현재 이집트 인구의 절반 이상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공식적으로는 10프로, 실제로는 20~25프로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1억 인구가 넘는 이집트에서 최소 1000만 이상의 수치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 콥트박물관 1910년에 세워진 콥트박물관, 초기기독교의 역사를 주로 전시하고 있다.
ⓒ 운민
그들은 다른 이집트인처럼 군대를 가야하는 의무는 없지만 실상 은근한 차별을 받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할 때마다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정책으로 인한 규제도 받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다른 이집트인과 차이는 없지만 이름을 통해 신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역을 나와 마주치는 성벽유적은 고대 로마인이 건설한 바빌론 요새다. 천년도시 카이로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여기서 바라보이는 오래된 건물은 콥트교회의 화려했던 성화 등 성유물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하는 콥트박물관이다.

고대 이집트의 호루스, 세트신이 자리했던 신상을 치우고 신전의 새로운 주인이 된 콥트교는 원시기독교의 색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성경부터 화려한 성화에 이르기까지 유물을 살펴보며 그들이 지녔던 종교적인 열의가 내 가슴 속으로도 와 닿는 듯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북적이던 고대 이집트 박물관과 대조적으로 찾는 이가 무척 뜸했다. 한동안 꺼져있던 전시관의 불이 켜진다. 뒤늦게 직원이 여길 살펴보려는 필자를 발견한 것이다. 사막의 고독한 수행자의 마음으로 유물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올드카이로, 콥트카이로
▲ 공중교회 고대 바빌론 요새의 기단위에 세워진 공중교회
ⓒ 운민
올드카이로는 콥트카이로라는 명칭으로 불리는데 이 박물관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를 둘러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공중교회는 말 그대로 바빌론 성채의 남서쪽 돌출 부분을 기초로 건설되어 있기에 받치는 기단이 없어 공중에 걸려있는 듯한 특이한 구조를 지녔다. 한동안 콥트 교회의 본부로 사용된 이 교회는 소담하고 정겨웠다.
다시 반대편으로 가다 보면 전철역에서부터 보였던 화려한 종탑을 지닌 거대한 규모의 성당을 만날 수 있다. 세인트 조지 교회라 불리는 이곳은 콥트교회가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에서 관리하는 교회다.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그리스국기가 펄럭이는 것을 보니, 이집트라는 나라의 관용성을 새삼스레 다시 보게 된다. 가장 화려한 내부를 지닌 성당이었지만 필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 성조지교회 그리스정교회 소속의 성조지교회
ⓒ 운민
사실 이 지역은 아기예수와 관련이 깊다.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헤롯왕은 구원자에 대한 예언을 듣고는, 화근(?)을 없애기 위해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2세 이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은 막 태어난 예수를 지키기 위해 피난길에 올라 이곳 동굴에 도착했다. 그곳은 성당으로 탈바꿈해 올드카이로에서 가장 신성한 성지가 되었다.
아기예수피난교회를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지도상으로는 한 구역 내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천년 이상을 거치면서 각자의 건물이 위치한 지표면이 달라졌다. 교회에 가려면 성조지수도원 앞에 있는 지하도를 통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 아기예수피난교회 아기예수의 가족들이 숨어살았던 아기예수피난교회
ⓒ 운민
현장에 가보니, 다른 곳과 달리 단체순례객들로 꽤나 붐빈다. 바실리카 양식으로 소박하게 지어진 이 교회의 지하로 가면 드디어 아기예수가 태어났다는 동굴을 만날 수 있다.

단출한 제단만 올려졌지만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장소다. 올드카이로 지역을 비롯해 전국 곳곳의 콥트교 지역은 이집트 군인의 엄중한 경호를 받고 있다.

이 지역 교인들은 쓰레기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으론 이집트 최대의 기업 오라스콤 회장을 배출하는 등 교인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다.

경제난이 가중되어 두 차례나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던 이집트는 민중의 불만이 점차 수면 위로 오르고 있고, 종교적인 갈등도 확산될 염려가 있는 상황이다. 이 지역에도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오길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강연, 프로젝트, 기고문의는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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