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안에서 들려온 '내 다리 잘라 줘'... 눈물이 벌컥 솟았다"

김병기 2024. 10. 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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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10만인] <길 위의 삼보일배·오체투지> 펴낸 세상과함께 윤경선 상임이사

[김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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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소연할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자벌레처럼 바닥을 기었다. 벼랑 끝 외침마저 듣는 이가 없을 때, 사람들은 세 번 걷고 한 번 절을 하면서 상대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섰다. 두 무릎과 두 팔꿈치, 이마를 땅에 대고 온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삼보일배·오체투지는 이제, 불교 수행법을 넘어 힘없고 소외된 자들이 언어가 됐다. 절규였고, 기도였다. 언제부터였을까?

20여 년 전, 새만금 개발과 이라크 전쟁, 4대강사업 등 무분별한 파괴가 자행되는 가운데 누굴 탓하기 전에 나부터 성찰해야 한다고 떠난 삼보일배, 오체투지. 그 묵언과 고행의 여정을 오롯이 담은 두 권의 책이 나왔다. <길 위의 삼보일배>, <길 위의 오체투지>(푸른역사 출판). 탐욕에 눈 먼 시대를 살아가는 눈 먼 자들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생생한 기록이다.

65일 삼보일배, 124일 오체투지 기록... 1만 2천쪽 자료 취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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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연의 한 개체입니다. 다른 개체들과 동등하죠. 그런데 우리는 더 빠르게, 더 편하게, 더 많이 무언가를 가지려고 다른 생명을 거침없이 해쳐왔습니다. 그 일을 직접 행하는 사람이 있지만, 남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돌아보고, 나부터 바뀌고, 나부터 욕심을 내려놓아야한다는 게 삼보일배와 오체투지의 정신입니다."

책을 출간한 사단법인 '세상과함께'(http://www.twtw.or.kr) 윤경선 상임이사가 강조한 말이다. 지난 20일, 세종시 영평사 인근의 세상과함께 센터 사무실이 있는 금선대에서 만난 윤 이사는 "무려 1만2천 쪽에 달하는 자료와 사진, 영상 등을 4년 동안 취합하고, 분류했다"면서 "그 뒤 3년여 동안 작가들의 손을 거쳐 내용을 다듬어서 세상에 내놓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삼보일배는 2003년 3월 28일부터 65일 동안 진행된 순례였다. 불교, 천주교, 원불교, 기독교 4대 종단의 성직자인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 김경일 교무, 이희운 목사가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시작했다. 새만금 갯벌을 살리고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삼보일배의 행렬은 서울 광화문까지 322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졌다.

"오체투지는 1차·2차로 나뉘어져 2008년 9월부터 2009년 6월까지 한 겨울만 피하고 사계절 동안 124일간 진행됐죠. 지리산 상악단에서 시작하여 계룡산을 거쳐 임진각까지 355킬로미터를 오체투지로 가셨습니다. 당시는 4대강 사업 문제뿐 아니라 광우병파동, 용산참사, 쌍용차 정리해고까지 정치, 사회, 자연환경 모든 영역에서 개발과 차별로 매일 이슈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멈추고 돌아보고 반성해야 했습니다."

묵언의 순례 1km 이동하는 데 2시간... 매일 1000배 @IMG@

이번에도 수경 스님, 문규현 신부가 맨 앞에 섰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였던 전종훈 신부도 함께였다. 매일 1000배를 올리는 비폭력, 묵언의 순례 행렬은 1km를 이동하는 데 2시간이 걸렸다. "몸은 더러워지고, 아스팔트 위의 흙냄새, 붙어 있는 껌들, 매연… 평소에는 무관심했던 부분이 시선에 들어왔다"(2권 책 82쪽). 하루에 4km 이상 갈 수 없는 고행이었다.

순례단 일지에는 이런 기록도 남아있다.

"어느 날은 새벽에 밥하러 나왔는데 차(숙소) 안에서 '내 다리 잘라 줘', '내 팔 잘라 줘' 하면서 앓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성직자들이) 너무 아프니까 자면서 비명 소리를 내는 거예요. 눈물이 벌컥 솟았어요."(2권 책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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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 명이 따라 나선 순례... 생명의 감수성 일깨운 죽비소리

성직자들이 앞장선 순례 행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나섰다. 뉴스를 보고 달려온 학생들,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동참한 중학생, 평범한 가정주부, 시민 단체 활동가, 노동자, 연예인, 작가, 학자, 외국인 등 다양했다. 냄비와 솥단지며 찬거리, 잠자리 천막을 차에 싣고서 달려와서 성직자들과 함께 참회의 순례를 했다.

"오체투지 2차 회향일에는 전국에서 천여 명의 시민들이 순례에 참여했을 정도"라면서 "삼보일배 때에도 순례길에 많은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정치인들도 방문했으며 다큐 영화도 만들어졌어요. 새만금 방조제가 결국 막히긴 했지만 중간에 공사를 중단하라는 법원 판결도 있었죠. 영국에서는 청소년들이 삼보일배 소식을 듣고 환경단체를 만들어 새만금 간척사업 반대 서명운동도 진행했습니다."

윤 이사는 이어 삼보일배, 오체투지 순례 이후 "무엇보다도 사회의 문제들에 대응할 때 방식의 변화가 생겼다"면서 "비폭력은 물론이고 화살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고, 시민들이 함께 하고, 마음이 모아지고, 종교를 넘어선 화합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길들을 제시했다"고 평가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티타스칼리지 교수)도 이 책의 맨 뒤에 남긴 '삼보일배·오체투지의 현재적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삼보일배·오체투지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운 죽비 소리입니다. 천지자연을 인간의 물질적 풍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켜 온 법과 제도의 민낯을 드러낸 비폭력-불복종 직접 행동입니다. (중략) 비폭력은 무기력이 아닙니다. 비폭력은 '폭력이 아닌 힘'입니다. 정당한 분노이고 뜨거운 눈물입니다. 기도입니다. 불복종은 '불의에 대한 불복종'입니다. 시민의 권리 주장이고 변화에 대한 의지입니다. '진실에 대한 복종'이 불복종입니다. 그래서 불복종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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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이 남긴 서록... "상생의 길 걸었던 분들의 발자취"

생명·평화·사람의 길을 갈구했던 삼보일배·오체투지 순례의 생생한 기록인 이 책에는 많은 이들의 육성이 오롯이 담겨있다. 성직자들이 쓴 글과 순례 진행팀이 남긴 일지, 또 당시 순례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이 남긴 말과 글이다. 자신을 한없이 내려놓고자 함께 나선 길이기에 한결 같이 꾸밈이 없고, 담백하다.

따라서 한 장씩 넘기며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순례의 행렬 한 가운데에서 자벌레처럼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굉음과 매연을 내뿜으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덤프 트럭의 바로 옆, 아스팔트 바닥에 엎드린 성직자들의 고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쩍쩍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 솟은 여린 싹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 그 때의 고마움과 희열도 맛볼 수 있다.

"많은 분이 단 한 번이라도 오체투지를 경험해 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지난해에 지리산에서 계룡산까지 오체투지를 통해 지렁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절절히 느낀 바는, 누구나 아는 소박한 삶의 진실입니다. 사람이 별것 아니라는, 산다는 게 별것 아니라는 새삼스러운 자각이었습니다. 그러한 '해방 체험'을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자유와 행복의 의미를 정직한 몸의 언어로 새겨 보자는 것입니다.(2권 책 134쪽, 수경 스님)

(사)세상과함께 발간위원회 송옥규씨는 이 책의 서문에서 "모든 생명체 간 용서과 공존을 기도하고, 지구와 인간이 하나라는 큰 연민을 가졌던 열린 마음들, 생명 존중의 정신을 실천하려 했던 이야기들"이라며 "너는 나의 뿌리이며, 나 또한 너의 뿌리라는 평등과 공동체 정신을 갖고 나부터 돌아보는 성찰의 자세로 상생의 길을 걸었던 많은 분들의 발자취"라고 소개했다.

국내외 구호단체인 '세상과함께'가 이 책을 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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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함께는 국내외의 빈곤층 지원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활동해온 단체이다. 전쟁과 빈곤, 차별로 고통을 받는 이들의 생명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6000여 명의 미얀마 아이들에게 의식주와 교육을 지원하고 있고, 내전으로 피신한 피란민들에게 구호품을 보내왔다. 또 국내 발달장애인들의 교육과 자립을 돕는 활동도 이어가고 있다. 왜 구호단체가 이 책을 펴낸 것일까?

윤 이사는 "구호단체 활동을 하면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더불어 살아가려면 환경과 생태 문제를 해결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면서 "환경 문제가 대두된 가장 큰 원인은 삼보일배·오체투지 순례에서 제시된 사람, 생명, 평화의 정신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가치를 많은 분들과 나누기 위해 책을 펴냈다"고 말했다.

세상과함께는 지난 2020년 '삼보일배오체투지 환경상'을 제정해 매년 전국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환경운동가와 단체들을 대상으로 시상을 하면서 응원을 하고 있다. 5회째인 올해 시상식은 오는 27일 세종 영평사 인근의 세상과함께 센터에서 열리며, 하루 전인 26일 오후 6시30분부터 영평사 삼명선원에서 환경상 전야제를 겸한 책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자세한 내용은 세상과함께 홈페이지(http://www.twtw.or.kr)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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