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앤장 변호사들마저 당황시킨 '법정 락카 실험 동영상'
[손가영 기자]
▲ 도로 락카칠 행위로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된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이 직접 아세톤을 뿌려 락카칠을 지우고 있는 모습. |
ⓒ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
"아세톤 3~6g을 아스팔트에 첨가한 결과, 점성이 크게 감소돼 도로포장용으로 쓸 수 없는 한계를 넘었고… 아세톤 100g을 아스팔트에 부어 44시간 후 관찰하니 27%의 강도 저하와 34%의 변형에너지 저하가 관찰됐으며…" (토목공학자 진술서 중)
경북 구미 제조업체 아사히글라스(현재 AGC) 해고자들은 재판 중 쓴웃음을 여러 번 지었다고 했다. 복직 투쟁 집회 과정에서 회사 앞 도로에 한 락카칠 제거 작업 비용을 회사가 해고자들에게 배상하라고 요구해 2019년 9월부터 시작된 재판에서 벌어진 일이다. 회사측이 산출한 비용은 5200만 원이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회사 측의 '과학 실험'에 해고자들은 씁쓸함을 느꼈다고 했다.
회사는 재판 중 해고자들이 아세톤을 도로에 뿌린 뒤 문질러서 락카칠을 지우는 영상을 증거로 내자, 한 토목공학박사에게 아세톤 유해성을 입증하는 연구를 의뢰했다. 회사는 당초 "락카칠을 지우려면 도로를 갈아엎을 수밖에 없어 5200만 원이나 지출했다"라고 했는데, 이후 "아세톤으로 지워진다 해도 아스팔트는 심각히 훼손된다"는 주장도 함께 했다.
해고자들은 이런 손배소가 얼마나 부당한지 직접 겪은 과학 실험 일화로 설명했다.
"락카칠을 지우는 영상을 직접 찍었다. 도로, 돌, 플라스틱 위에 락카칠을 하고 아세톤을 부어 헝겊, 구두솔로 문질렀고 40초 만에 흔적을 지웠다. 이 영상을 법정에서 틀었다. 그때 회사 측 김앤장 변호사들과 판사의 당황한 표정이 생생하다. 판사가 다시 묻더라. '쉽게 지워지는데요?'라고."(차헌호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 지회장)
▲ 회사 측이 법원에 증거로 제출한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소속 한 토목공학박사 연구원의 진술서 내용 갈무리. A4용지 8장 분량의 진술서엔 아세톤이 아스팔트에 얼마나 유해한지를 확인하는 연구 결과 내용이 담겼다. |
ⓒ 아사히글라스비정규직지회 |
락카칠 때문에 도로 재포장해 5200만 원 썼다?
양측은 5200만 원 산정 근거를 두고도 팽팽히 다투고 있다.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은 해고 5년 째인 2019년 6월 회사 앞에서 복직 투쟁 집회를 열다 "아사히 불법파견 책임져라" "전원복직" "비정규직 철폐" 등의 문구를 도로 위에 락카로 썼다. 회사는 이 제거작업을 한 회사에 맡겨 5200만 원을 지출했다며 전액을 해고자들에게 청구했다. 비용이 비싼 이유는 낙서가 된 도로를 새로 포장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노조는 "회사가 고의로 금액을 과장했다"고 주장한다. 우선 아세톤으로 제거할 수 있었고, 직접 제거 전문 업체를 알아본 결과 780여만원 짜리 견적서를 받았다. 이 업체는 도로를 포장할 필요 없이 특수차량과 약품으로 이틀이면 제거 가능하다고 밝혔다. 만약 인력을 사서 아세톤으로 제거한다면, 아세톤 18L 7만 7000원, 면장갑 100켤레 1만 2000원 등 총 약 56만 원의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됐다.
차 지회장은 "차 문을 열다가 옆 차를 콕 찍었다고 새 차로 바꿔 달라고 하는 상황"이라며 "회사가 제거를 맡긴 업체는 전부터 회사 내부 공사를 수주해온 토목·건축 하청업체"라고 말했다.
해고자들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으로 보고 있다. 회사가 2019년부터 3년 째 대형 로펌 김앤장 변호사를 복수로 선임했고, 전문가에게 과학 실험과 결과보고까지 의뢰해 실험 비용으로만 최소 수백만원 가량은 추가 지출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노조 활동 봉쇄 소송인 걸 방증한다"는 것이다.
결국 회사는 아세톤 유해성에 대해 과학 감정을 다시 받아보자고 재판부에 요구해 이 내용이 받아들여졌다.
▲ 27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기본소득당, 무소속 등 현역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노란봉투법 정기국회 중 처리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공동취재사진 |
과학 감정까지... "이럴 인인가"
도로 락카칠엔 재물손괴죄가 적용되지만 무죄 판결이 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락카칠이 도로의 효용인 차량 통행을 방해하지 않으며, 도로 복구에도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노조 파괴 문제로 오랜 노사 갈등을 겪은 대전 유성기업 노동자들도 2015년 락카로 회사 비판 문구를 도로 위에 썼다가 재판에 넘겨져 무죄를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는 "낙서가 미관을 해치거나 불쾌감을 줄 순 있으나 통행을 방해하지 않고, 낙서 제거에 특별한 경비가 들지 않고 쉽게 회복이 됐다"며 "도로의 효용을 해쳤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다만 아사히글라스 해고자들은 재물손괴죄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이 재판부는 "(락카칠이) 통행을 방해하진 않는다"면서도 "당초 신고한 집회 범위를 벗어났고 광범위한 낙서가 외관을 해치는 정도가 적지 않으며 회사 임직원, 거래처 관계자가 주요 통행로로 쓰는 진입로의 효용을 해쳤다"고 밝혔다. 해고자들은 부당하다고 항소했다.
김혜진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공동집행위원장은 27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회사의 불법이 먼저 있고, 이것이 시정되지 않아 노조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일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며 "노조파괴, 부당해고, 불법파견 문제만 7년을 넘은 아사히글라스도 마찬가지로, 근본 원인을 제공한 회사 불법을 먼저 봐야 한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또 "노동자들이 진실로 얼마만큼 손해를 입혔느냐를 보지 않고, 회사가 일방적으로 청구한 수십억, 수백억 원대 손해를 법원이 쉽게 받아주면서 문제가 심각해진다"며 "이를 제한하고, 정당한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히는 노란봉투법의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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