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다. 2024년, 누군가는 밴드 붐을 말했고 누군가는 K 없는 K팝을 말했다. 커다란 시대의 흐름 앞에 무언가 당장이라도 180도 뒤바뀔 것처럼 소란스러운 한 해를 보낸 뒤 별다를 것 없는 새해를 맞이한 지도 벌써 수개월이 되었다. 새로운 계절과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차가운 감각이 빠르게 교차하는 사이, 언제나처럼 오랫동안 벼러온 자신의 소리와 이야기로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노크하는 음악가들이 있다. 2025년, 지금 주목하면 절대 손해 보지 않을 8명의 음악가를 소개한다.
1. 유령서점
한국의 슈게이즈*는 주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때마다 끊임없이 좋은 음악가를 배출해 온 독특한 씬이다. 시계가 돌고 돌아 밴드 음악이 다시 청춘을 대변하는 건가 싶은 착각이 슬쩍 드는 요즈음, 때를 노려 나를 잊었던 건 아니냐며 슈게이즈가 다시 슬쩍 고개를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좋은 시기가 늘 그렇듯 다채롭게 뻗어나가는 새로운 음악의 가지 속 유령서점이 있다. 2024년 4월 발표한 첫 싱글 ‘별의 피가 흐르는 아이들’은 원형을 알 수 없도록 뭉그러진 사운드 속 멍든 마음을 한 번이라도 기대본 이라면 불가항력처럼 그리운 마음이 들게 만드는 순도 높은 슈게이즈 트랙이었다. 이후 발표한 첫 EP [유령서점]은 그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면서도 대다수의 곡을 쓰는 멤버 김수의 노래에 어린 특유의 애틋한 감상(感想)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수작이었다.
*슈게이즈(shoegaze):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까지 영국 인디 씬에서 유행한 장르로, 신발을 뚫어지게 본다는 뜻에서 파생된 단어. 관객과 소통하지 않고 신발만 보며 연주하는 무대 매너 때문에 생긴 말.
2. Yves 이브
생각해 보면 이브는 언제나 잘했다. 퍼포먼스로 유명한 그룹 이달의 소녀에서 메인 댄서로 활약한 그는 팀 명의로 공개되는 무대와 연습 영상마다 유독 돋보일 때가 많았다. 잘하는 12명 가운데 ‘눈에 띈다’는 만만치 않은 미션을 애초에 통과한 이브는 안정된 가창력과 고유의 분위기까지 갖춘, 솔로로 데뷔하는 그림이 그리 낯설지 않은 멤버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런 이들 가운데 이브의 솔로 커리어가 지금처럼 퍼져나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독립 후 프로듀서 밀릭이 설립한 음악 레이블 파익스퍼밀(PAIX PER MIL)과 계약하며 본격적인 솔로 활동에 시동을 건 이브는 힙합과 R&B, 하이퍼 팝과 케이팝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케이팝 너머의 케이팝을 자신만의 언어로 유연하게 그려 나갔다. 그가 가는 모든 길이 옳은 길보단 새로운 길이 되길 기대하게 한다.
3. 주혜린
음악은 보통 멜로디와 비트가 이끌지만, 우리의 가슴을 최종적으로 치고 가는 건 결국 노랫말이다. 아름다운 형태로 우아한 조형미를 선보이는 고급 노랫말의 향연이 만든 잔잔한 호수에 주혜린은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주머니에서 한참 굴리던 동그란 조약돌을 풍덩풍덩 던진다. ‘응 그 노래 알지 / 너도 이 노래 좋아해? / 신기해 나돈데 / 너랑 말하는 게 너무 좋은 거야.‘(‘미친 건가’) 지난해 첫 EP [COOL]에 담긴 주혜린의 노래는 친구나 연인에게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뭐해?’로 시작하는 대화처럼 천진하고 친숙했다. 그렇게 당장 어젯밤 나든 너든 각자의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상적인 말에 멜로디와 연주가 타고난 듯 붙어 흘렀다. 분명 짧지 않은 시간 동료들과 함께 깎고 다듬어 만들어 냈을 텐데도 사랑과 이별 앞에 모든 것이 한없이 세련되고 쿨했다. 이건 분명 뚜렷한 재능이다.
4. 강지원
태어나며 품은 씨앗이 꽃을 피우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프로듀서이자 연주자, 싱어송라이터로 음악계 전반에서 활약하고 있는 강지원의 씨앗은 유독 일찍 꽃을 피웠다. 취미로 자유롭게 배우던 음악으로 예고 예대를 차례차례 수석으로 클리어한 그는 부담 아닌 부담을 안고 차곡차곡 자신의 작업을 쌓아 갔다. 그렇게 차분히 걷던 길 위에서 유라를, 샘 김을, 아이유를 만났다. 이제 막 음악을 시작한 이에게는 한 번 찾아오기도 쉽지 않은 좋은 기회들이었다. 지난해 10월 발표한 데뷔 EP [Weather]는 강지원이 그렇게 그려온 길이 단지 타이밍이나 운이 아닌 실력이자 색깔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당장 증명하겠다며 조급해질 만도 하건만, 앨범 속 소담하게 담긴 4곡의 노래는 딱 좋은 온도로 데워진 찻잔처럼 오로지 따뜻하고 느긋했다. 이런 차라면 몇 번이고 질리지 않고 리필이 가능하다. 어쩌면 그건 강지원의 가장 큰 무기일 테다.
5. O’KOYE 오코예
이제는 기세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해도, 힙합은 여전히 젊은 음악가들이 눈치 보지 않고 뛰어놀 수 있는 너른 음악 들판이다. 래퍼 이쿄(IKYO)와 프로듀서 오투(The o2)가 결성한 듀오 오코예는 지난 수년간 자유보다 형식이나 규범에 얽매여 오도 가도 못하던 한국 힙합계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진짜배기였다. 두 사람이 오코예 명의로 처음 발표한 정규 앨범 [Whether The Weather Changes Or Not]은 힙합과 재즈 같은 음악 장르는 물론 음악을 만드는 방식, 앨범에 참여한 음악가의 면면, 곡마다 뚜렷하게 담은 메시지까지 이 모든 게 한자리에 있다는 것이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의 한 판 난장이었다. 지난해 각종 연말 결산에서 이들의 이름이 빼놓지 않고 언급된 건 앨범을 파면 팔수록 진하게 다가오는 음악을 탐구하는 두 사람의 진지한 자세와 그러한 자세가 담보한 시대를 타지 않는 멋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6. Kandis 캔디스
‘굳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게 하는 음악가는 무조건 관심 바구니에 담아두는 버릇이 있다. 살다 보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에 굳이 애를 쓰는 사람은 그것이 성공이든 실패든 결국 무언가 해내고야 만다는 삶의 지혜를 얻은 탓이다. 2025년 완전체로 발표하는 첫 앨범이자 무려 16곡이 담긴 정규 앨범 [Playground]를 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4인조 걸 그룹 캔디스를 보며 오랜만에 버릇이 동했다. 이 팀은 뭘 해도 될 팀이구나. 캔디스는 2023년 멤버 헬로와 나인 두 사람을 먼저 공개하며 발표한 ‘BF’를 시작으로 베니, 루키를 차례로 합류시키며 말 그대로 팀을 ‘만들어’ 나갔다. 마지막 멤버를 확정하고 4개월여 만에 발표한 [Playground]는 최근 케이팝 신에서 은은하게 유행하는 90년대 R&B, 힙합 그룹의 향기를 짙게 풍긴다. 프로듀서 보이콜드, 기타리스트 김한빈, 작곡가 빅싼초 등의 든든한 서포트에 힘입어 멤버 헬로가 직접 빚어낸 솜씨다.
7. SOUL DELIVERY
소울 딜리버리
종종 태도가 모든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음악으로 예를 들어 보자. 음악을 대하는 태도, 음악가나 팬을 대하는 태도, 공연이나 음반을 대하는 태도. 쓰고 보니 더 명확해진다. 주관적 판단이 들어갈 위험성을 차치하고라도,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지켜볼 때 태도를 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4인조 R&B, 소울 밴드 소울 딜리버리는 바로 그 ‘태도’면에 있어 10점 만점에 10점을 줘도 아깝지 않은 팀이다. 2022년 이후 10곡 이상씩 꽉꽉 채워 매해 발표하는 정규 앨범, 자신들의 추구미로 꽉 채운 공간 ‘리듬소망사랑’, 음악과 공간에 담은 가치를 확장해 개최한 ‘RSS 뮤직 페스티벌’,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팟캐스트 ‘NOGARI’와 ‘잼 세션’까지. 단순히 음악을 ‘하는’ 것을 넘어 함께 음악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 이들의 미래가 밝지 않을 리 없다.
8. 김한주
밴드 실리카겔이 2023년 12월 발표한 [POWER ANDRE 99]는 반응에서 볼륨까지 원하든 원치 않든 일종의 시대정신이 되어 버린 밴드의 원기옥 같은 앨범이었다. 앨범 발표를 전후해 차력처럼 이어진 단독 공연과 국내외 페스티벌 출연 이후 한숨 돌리고 있는 멤버들의 2025년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미 놀이도감이라는 솔로 프로젝트로 활동하고 있는 기타 김춘추와 밴드 와 와 와(Wah Wah Wah) 멤버로도 활동 중인 베이스 최웅희에 이어 드럼 김건재도 2022년 데뷔한 밴드 Shirakami Woods(시라카미 우즈)의 첫 정규 앨범 [HAEILO]를 발표한 상황, 사람들의 주목이 밴드의 프론트맨 김한주로 향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다. 지금껏 단지 음악뿐만이 아닌 문화예술계 전반에서 활약해 온 그는 예상보다 느리게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음악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지난해 뮤지션 콜렉티브 박쥐단지의 첫 앨범 [Bat Apt.]를 통해 첫 솔로곡 ‘Life of…’를 선보인 그는 지난 2월 열린 애플 쇼케이스에서 새 노래 ‘Yes’를 추가로 공개했다.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된 건 없지만, 생각보다 단출한 그러나 분명 뻔하지 않은 걸 들려줄 거라는 믿음의 반짝이는 씨앗 같은 노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