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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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기자]
편의점 알바를 해본 사람은 다 공감하겠지만 배고파서 뭔가를 입에 넣으면 꼭 손님이 들어온다. 계산하고 손님을 보낸 다음 기다리면 또 아무도 들어오지 않다가 이제 안 오겠지 싶어서 다시 한 입 먹으면 또 손님이 들어온다.
그럼 먹던 걸 도로 뱉든지 급하게 삼키든지 해야 한다. 한 번은 빵을 씹을 새도 없이 바로 삼키다가 숨이 막혀서 자리에 주저앉은 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손님을 탓하는 건 불합리하다. 알바생의 식사 시간이 따로 없어 생기는 문제니까.
▲ 편의점에서 일할 때는 폐기상품이 내 주식이었다. |
ⓒ 김아영 |
미안한 마음은 반대 입장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손님으로서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알바생이 컵라면이나 삼각김밥을 먹고 있으면 괜히 미안해진다. 내가 얼마나 달갑지 않은 손님일지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물건을 고르고 편의점을 나온다.
계산원으로 일한 뒤로는 계산대에서 먹는 점원이 도저히 근무 태만으로 보이지 않았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또는 폐기 상품을 먹는 계산원을 볼 때마다 밥상의 빈부격차는 줄일 수 없더라도 밥 먹는 시간만큼은 모두에게 평등했으면 하는 바람이 강해졌다.
다행히 식자재 마트에서 일할 때는 식사 시간을 보장 받았다. 정해진 시간은 40분이었다. 왜 한 시간이 아닌가 했더니 근무 중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미리 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 주차장 한 쪽에 있는 아담한 직원 식당 |
ⓒ 김아영 |
"아이고, 먹고 있는데 미안해요."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말하고 얼른 바코드를 찍었다. 남몰래 잇몸에 낀 달걀노른자를 다급히 혀로 훑으며. 그 손님은 내가 먹는 모습을 보고 일부러 한 걸음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계산원이 근무 중 먹고 있으면 밉게 볼 법도 한데 오히려 자신이 먹는 걸 방해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머쓱하고 한편으론 너그러이 이해해주시는 게 참 감사했다.
정말 힘이 되는 일은 이런 고운 말씀을 해주시는 손님이 꽤 많다는 것이다. 전에 계시던 청과 팀장님은 새로 과일이 들어오면 맛 좀 보라고 참외, 수박, 사과 따위를 두세 조각씩 주시곤 했는데 행여 손님이 올 세라 허겁지겁 과일을 입에 넣고 있으면 보고 계시던 손님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을 거 먹고 해요"라고 걱정하듯 말씀해주신 적도 있다. 그게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한 말이라서 마음이 따뜻했다.
계산대에 서서 똑같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스스로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이처럼 인정이 넘치는 손님을 만날 때마다 다시 피가 도는 기분이다. '그래, 내가 이걸 일로만 대하면 손님들도 계산대가 불편해지겠지' 하는 새로운 각오가 생기고 좀 전까지 지쳐서 만사가 귀찮았던 몸이 가뿐해지고 따뜻한 기운이 샘솟는다.
▲ 설날과 한가위는 마트 입장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
ⓒ 김아영 |
역시 본격적인 연휴가 시작되자 마트는 평소보다 훨씬 손님으로 붐볐다. 여기저기서 손님과 직원의 말소리가 서로 어우러지고 활기가 돌자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들떴다. 아무리 대목이어도 어차피 늘 하던 일, 이틀 더 한다고 몸에 무리가 갈까 싶었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점이 있다. 집에서 마트까지는 버스로 30~40분, 빠른 걸음으로 대략 1시간 20분 거리였다. 나는 체력 단련을 한답시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일 걸어서 출근했다.
▲ 규모가 큰 마트에서는 보통 계산대를 두 개 이상 운영한다. |
ⓒ 김아영 |
대식가인 체질을 고려하면 평소보다 적게 먹은 편인데도 속이 징건했다(더부룩했다). 마침 점장님이 선물로 아이스크림이 들어왔다며 직원들에게 하나씩 돌렸고 나는 다른 계산원 이모와 카스텔라 아이스크림을 반씩 나눠 먹었다. 시원한 걸 먹으면 속이 좀 진정될까 했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이러다 말겠지 싶던 복통이 점차 심해지고 온몸에 힘이 쭉 빠져 두 팔로 계산대를 짚지 않으면 서 있기도 힘들었다. 조금만 버티자는 마음으로 계산을 해나가는데 한 손님이 계산이 끝난 뒤 나에게 물었다.
"어디 아파요?"
엄마뻘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는데 몸이 안 좋은 걸 들키고 싶지 않아 얼른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얼굴이 창백해. 너무 아파 보이는데."
손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한껏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냥 살짝 어지러워서… 괜찮아요."
손님이 돌아간 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힘겨운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지만 바쁜 시기에 몸이 안 좋다고 조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좀 전의 그 손님이 장을 덜 보았는지 물건을 더 골라 다시 계산대로 왔다. 그러더니 아까보다 더 심각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좀 쉬어. 쉬어야겠어."
손님은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옆 계산대로 가서 계산원 이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요, 이 분 좀 쉬게 해줘요. 얼굴 좀 봐. 안색이 너무 안 좋아."
계산원 이모는 날 보더니 어디 안 좋은지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손님은 끝까지 강변했다.
"이러다 쓰러진다니까. 내가 볼 땐 얼른 쉬어야 해."
손님이 어찌나 힘주어 말씀하시던지 다른 사람들까지 이 광경을 보게 되었고 점장님과 사모님 모두 날 보고 얼른 들어가 보라고 하셨다.
"아프면 말을 하지 뭘 참고 있어. 아무래도 더위 먹은 것 같다. 집에 갈 땐 꼭 버스 타고 가."
이쯤 되니 내가 계속 있는 게 오히려 민폐겠다 싶어서 양해를 구하고 출근한 지 세 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땀으로 끈적해진 몸을 개운하게 씻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손님의 걱정 어린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손님이 아니었다면 미련하게 아픈 걸 참아가며 여태 일하고 있겠지.'
생판 남인 나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준 그 마음이 고마워서 다음에 만나면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다. 사실 일 경험을 얘기하다 보면 이른바 진상 손님이나 부정적인 얘기를 먼저 꺼내게 되는데,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손님에게 감동 받는 상황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편이다.
○ 편집ㅣ 최은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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