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발전소가 보이지 않자, 비로소 마을이 보였다

정윤영 2026. 9. 23.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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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핵발전소를 등진 마을은 이름을 모르는 덩굴나무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기장처럼 '핵발전소에 연루되어 끌려다니며' 살고 있을까, 아마 그렇겠지 생각했다.

핵발전소 건물을 올리고 원자로를 늘리는 동안에는 저 건물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을지도, 공장처럼 바쁘게 돌아갔을지도, 그래서 돈을 좀 벌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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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핵발전소 기자회견부터 사용후핵연료 설명회까지, 숨 막히는 탈핵의 길

[정윤영 기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끔 마당에 짧은 줄에 목이 묶인 개들만 순례단을 보고 컹컹 짖었다. 핵발전소와 가까워지면 보이는 것이 있다. 송전탑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송전탑이 가까워지고 하늘에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줄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곧 핵발전소의 둥근 지붕이 보인다.
 탈핵순례단이 걷는 길 뒤로 한빛핵발전소가 보인다
ⓒ 정윤영
신규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하는 한빛핵발전소 기자회견장에는 한 명의 기자가 있었고, 열 명이 안 되는 참가자가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경찰과 한수원 직원들이 참가자만큼 나와 있었고, 한수원 직원들은 굳은 얼굴로 기자회견 참가자들의 얼굴과 발언을 휴대폰으로 찍느라 바빴다.

영광에서, 울진과 경주에서 청와대로 가는 탈핵순례단의 첫날이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순례를 시작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현수막 속 문구였다.

"산재보험도 없이 원전 설비를 만졌다"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할 게 없는 핵발전소를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핵발전소 노동자(https://omn.kr/2iew5)라는 말이 떠올랐다. 원전 설비를 만져야만 하는 핵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언들을 떠올리며 다시 걸었다.

핵발전소가 보이지 않자 비로소 마을이 보였다

둥근 지붕이 시야에 보이지 않자 동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핵발전소를 등진 마을은 이름을 모르는 덩굴나무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깊게 얽히고 길게 뻗은 덩굴나무는 커다란 그늘을 만들었고, 순례단은 내리꽂듯 뜨거운 햇살을 피해 나무 아래로 걸었다. 위를 올려다보면 덩굴나무는 우산인 듯, 또 하늘에 놓인 초록색 다리인 듯 보였다.

땀이 흐르고 목이 마르는 더운 날이었지만, 오래된 나무와 무성한 풀에서만 나는 초록의 향이 느껴졌다. 싱그러운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 온도가 낮아지는 듯, 주변이 시원해졌다. 방사선과 핵 폐수는 눈에 보이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으니, 가끔 보이는 방사선 비상경보 설비나 대피 시설 안내판, 송전탑만 아니면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동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한 건물이 눈에 띈다. 복지회관 건물은 크고 네모반듯했고 아주 새것이었다. 핵발전소에서 지역 기금으로 만든 것인지 '삶에 에너지를 드리는 한수원'이라는 글자가 새로 지은 듯한 복지회관에 적혀 있었다.

이 마을 사람들도 기장처럼 '핵발전소에 연루되어 끌려다니며' 살고 있을까, 아마 그렇겠지 생각했다. 마을 사람들은 시설이 들어서면, 일자리도 생기고 마을이 살기 좋아질 거라는 한수원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을 것이다.

복지회관에서 십 분쯤 걸었을까. 공장처럼 쓰던 건물처럼 보이는 컨테이너 두 개가 폐허처럼 낡아가고 있었다. 녹이 슬고 바닥에는 나무판자가 쓰러져있었다. 쓰지 않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핵발전소 건물을 올리고 원자로를 늘리는 동안에는 저 건물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었을지도, 공장처럼 바쁘게 돌아갔을지도, 그래서 돈을 좀 벌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OO 개발이라는 현판만 남아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핵발전소 근처, 이제는 쓰지 않아 폐허가 되어버린 공간들이 눈에 띈다.
ⓒ 정윤영
읍내까지 나오자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에 공원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명품숲이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공원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나무목과 맨발 걷기용 황톳길, 정자와 운동 기구 하나가 전부였다.
정자에 앉으니 코앞에 송전탑이 보였다. 지붕 낮은 집들이 바로 뒤에 있었다. 매일 보는 사람들은 익숙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보일 송전탑은 해괴한 장면이었다. 그런 장면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났다. 순례가 아니었으면, 함께 걷는 길이 아니었으면 보지 못했을 장면이었다.
 송전탑뷰라고 해야 할까. 읍내에 조성한 작은 공원 앞, 송전선로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집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었다.
ⓒ 정윤영
'임시 저장'이라지만, 주민들은 불안하다

순례 첫날의 마지막 일정은 한빛원자력본부에서 개최한 '부지 내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 설명회·토론회가 열리는 장소였다. 한빛원자력은 한빛 7호기와 8호기 신규 건설뿐 아니라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 수조에 저장되어있는 사용후핵연료를 밖으로 꺼내 부지 내 저장시설에 보관하겠다는 것이다.

주민들은 물론 반대하고 있다. 한수원은 이를 임시 보관, 중간 저장 시설이라고 하지만 사실 원전 내 저장시설은 핵폐기물 영구 처리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주민들은 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고준위 핵폐기물을 안전하게 저장하거나 완벽하게 처분하는 곳은 전 세계에 한 곳도 없다.

한수원은 처분 기술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아직 부지조차 선정하지 못했다. 중간저장시설이 영구처리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영광 주민들은 지역이 장기간 방사성폐기물을 떠안게 될 가능성을 우려하며 원전 추가 건설과 핵폐기물 반입에 반대하고 있다.

행사장 입구에는 보안요원들이 배치돼 출입자들의 신분증을 확인했다. 일부 주민들은 구호가 적힌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행사장 출입이 제한됐다고 주장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한수원의 설명회가 형식적인 자리에 그쳤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수원은 주민들의 우려에 안전하다는 설명을 반복했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며 반발했다. 설명회가 끝나고 첫날의 순례가 끝이 났다.
 탈핵순례 열흘째. 전북도청에서 삼례읍까지 걷는 길에 만난 이는 탈핵순례를 사람을 '살리는 투쟁'이라고 했다.
ⓒ 정윤영
한빛핵발전소 앞 기자회견부터 설명회까지 탈핵의 길은 숨 막힐 듯 답답해 보였다. 그러나 어디서고 바람을 만날 것을, 길은 계속될 것을 순례단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탈핵을 향해 또 걷는다. 생명의 편에서 함께 걸을 이들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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