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속 어둑한 방”…한강, 노벨상 후 첫글 공개 [전문]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글이 공개됐다. 외할머니에 관한 아련한 기억을 담담히 풀어낸 짤막한 글이다.
한강의 새 글은 15일 밤 발행된 온라인 무크지(비정기간행물) ‘보풀’ 3호에서 한강이 연재하는 코너 ‘보풀 사전’을 통해 전해졌다.
‘보풀’은 한강을 비롯해 음악가 이햇빛, 사진작가 전명은, 전시기획자 최희승 등 4명이 함께 만든 무크지로 작가들의 글이나 글과 연계된 사진, 미술 작품, 음악 등을 감상할 수 있다. 구독하면 누구나 이메일로 받아 볼 수 있다.
보풀 SNS에는 “보푸라기 동인 한강은 소설을 쓴다.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에 이끌려 작은 잡지 ‘보풀’을 상상하게 됐다”는 한 작가의 소개글이 게시돼 있다.
이번 호 주제는 ‘새’다. 이에 따라 한강은 ‘깃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흰머리를 깃털에 비유한 이 글에서 한강은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고 했다. 전문을 함께 읽어보자.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큰아들이 태어난 뒤 막내딸을 얻기까지 십이 년에 걸쳐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의 둘째 아이인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 외가로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라오던 아침, 발톱을 깎아드리자 할머니는 ‘하나도 안 아프게 깎는다… (네 엄마가) 잘 키웠다’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쓸었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했던 인삿말을 그날도 하셨다. 아프지 마라. 엄마 말 잘 듣고. 그해 10월 부고를 듣고 외가에 내려간 밤,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볼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잡고 병풍 뒤로 가 고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진행된 스웨덴 공영 SVT 방송과의 인터뷰 내용이 이날 전해졌다. 한강은 “나는 평화롭고 조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고 글쓰기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왜 축하하고 싶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엔 “아니다. 아들과 함께 카모마일 차를 마시며 축하했고, 축하하고 싶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되물었다.
이에 기자가 당신의 부친이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딸이 전쟁 등 세계의 상황 때문에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언급하자 한강은 “뭔가 혼란이 있었던 거 같다. 그날 아침 아버지께 전화드렸을 때 아버지는 마을에서 사람들과 큰 잔치를 하려고 했는데 나는 그게 좋지 않아서 그런 큰 잔치는 하지 마시라고 했다”고 답했다.
이어 “나는 조용히 있고 싶다.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며 “그게 내 생각이어서 잔치를 열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한강은 노벨문학상 발표 직후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상황에 대해 “인터뷰할 때 장난인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진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돌이켰다. 그는 오는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노벨상 시상식에참석할 것이라면서 현재 집필 중인 소설을 빨리 끝내고 수락 연설문 작성에 집중하겠다고 전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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