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세균은 없다… 인류사 바꾼 미생물 이야기
몰랐다.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같은 미생물들이 인류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것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미생물 학자로 역사 읽기를 좋아한다는 저자는 “역사에 기록된 미생물은 대체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다”면서도 “인간 역사에 두려움을 드리운 경우에라야 존재감이 두드러져서 그렇지 무서운 미생물을 전체에서 소수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책에는 무서운 얼굴을 한 미생물이 많이 등장하지만 시작은 착한 미생물이다. 인류의 시작부터 즐거움을 선사했던 술과 관련된 효모다. 술은 곰팡이의 친척쯤 되는 단세포 생물인 효모에 의해 당이 알코올 발효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진다. 인류가 술을 어떻게 즐기게 됐는지에 관한 이론 중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 있다. 잘 익은 과일에서는 껍질에 있는 효모의 도움으로 자연 알코올 발효가 일어난다. 이 ‘과일 술’에 적응해야 과일 확보에 유리하고, 적당히 취해 기분이 좋아지면 더 열심히 먹이를 수집했을 것이기 때문에 다른 개체와의 경쟁에서 유리했다는 설명이다. 술은 축제나 종교의례에서 사용됐고, 일부 학자들은 인류가 맥주를 만들게 된 것이 정착해서 농사를 짓게 한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호모 사피엔스를 문명화된 종(種)으로 만드는 데 미생물이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한다.
미생물은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기도 했다. 19세기 초 영국 도시 곳곳에서는 콜레라가 창궐해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리버풀에서만 1832년 5월부터 9월 사이 1523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원래 인도 늪지대에서만 유행하던 콜레라는 대영제국의 함선을 따라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는 콜레라가 콜레라균에 의한 것인지, 어떤 경로로 발생하고 확산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때 런던의 의사 존 스노는 런던 브로드가에서 발생한 콜레라의 감염자 현황을 체계적으로 추적해 지도에 표시했다. 최초의 역학조사였다. 지도에 표시된 점들은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공용 수도 펌프였다. 스노는 당국을 설득해 오염된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했고, 이후 콜레라는 잦아들었다. 스노는 다른 조사를 통해 콜레라가 결국 오염된 물과 관련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런던은 대규모 하수도 망을 건설한다. 당시 일간 더 타임스는 콜레라를 ‘최고의 위생 개혁가’로 소개하기도 했다.
책은 도시국가 아테네의 쇠퇴를 재촉한 장티푸스, 아메리카 대륙의 아스테카 왕국과 잉카 제국의 멸망을 이끈 천연두, 1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좌우했던 스페인 독감 등을 거쳐 ‘무서운 얼굴의 미생물’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기 시작한 페니실린의 이야기로 안내한다. 페니실린은 1928년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에서 우연히 발견한 항생물질이다. 페니실린은 인류가 최초로 감염질환을 극복하는 무기였다. 2차 세계대전 중반까지는 전투에서 직접 총에 맞아 사망하는 경우보다 상처에 생긴 세균 감염으로 죽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페니실린이 항생제로 개발된 후 더 이상 군인들은 세균 감염으로 죽지 않았다. 전쟁의 승기를 연합국 쪽으로 돌린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군인들과 함께 페니실린 주사액 수백만 개도 함께 상륙했다고 한다. 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시사잡지 라이프에는 ‘페니실린 덕분에, 그는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는 제목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다.
페니실린 이후 인류는 곰팡이와 세균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만들어 낸 소량의 물질을 항생제로 개발하면서 각종 감염질환을 정복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항생제 내성으로 기존 항생제가 효과가 없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저자는 “어쩌면 흔한 세균 감염에도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포스트 항생제 시대’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면서 “다시 우리의 미래를 세균에 저당 잡힐 수도 있다는 의미”라고 우려한다.
그래도 다시 희망은 싹트고 있다. 인체에 존재하는 미생물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마이크로 바이옴’ 연구를 통해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생물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였던 조현병이나 자폐스펙트럼장애 환자도 특정 장내 세균이 부족하다는 연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인체 내 미생물 분포의 불균형으로 생긴 병이라면 정상으로 바꾸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가설이 나오고 당연히 많은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과도한 항생제 사용으로 장내 마이크로 바이옴이 파괴된 사람에게 건강한 사람의 마이크로 바이옴을 통째로 이식하는 ‘분변 미생물 이식술’도 개발됐고, 식중독균인 리스테리아균이나 장티푸스균을 이용해 암 치료에 활용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저자는 “인류가 달성하지 못한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은 어쩌면 미생물에서 그 답을 찾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책의 독자라면 이제 모든 미생물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는 대부분의 미생물은 ‘기회주의적 병원체’로 분류된다고 설명한다. 인체의 방어능력이 약해졌을 때만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라는 의미다. 또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미생물도 적지 않다. 결국은 사람의 손에 달렸다. 저자는 “우리는 이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더 많이 알아내야 하고, 또 그것을 현명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역사는 그에 따라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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