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 될 수 있었던 왕세자들, 망친 것은 아버지였다

이준목 2025. 11. 19. 14:4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2>

[이준목 기자]

▲ 벌거벗은한국사2 광해군과 소현세자
ⓒ TVNSTORY
광해군(조선 15대 국왕)과 소현세자(조선 16대 인조의 아들)는 역사적으로 평행이론에 가까운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 왕의 후계자로 태어났지만 일반적인 왕세자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두 사람은, 각각 엄청난 국가적 위기(임진왜란, 병자호란)를 겪어야 했고, 부자가 아니라 정적이 돼버린 아버지와의의 비극적인 관계로 고통받았으며, 그리고 최후에는 불행한 파멸을 피하지 못했다.

11월 21일 방송된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2>에서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왕세자들, 광해군 VS 소현세자'편을 다뤘다.

광해군은 1575년,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했고, 후궁 소생의 왕자만 7명이나 존재했다. 광해군의 어머니도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선조는 일본군의 침입을 피하여 수도를 떠나 몽진을 해야 했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급하게 세자를 책봉해야만 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결국 선조는 내키지 않았지만, 왕자들 중 가장 신하들의 지지를 받는 광해군을 마지못해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은 조선 왕조 역사상 최초로 후궁 소생의 세자가 됐다.

사실 선조는 세자 책봉 이후 분조(分朝, 조정을 둘로 나눈다)를 시행하여 광해군에게 국정을 맡기고 자신은 명나라로 도망 가서 망명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선 역사상 분조를 이끈 최초의 세자가 됐다.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고작 18세에 불과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어린 나이에도 분조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기대 이상의 활약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당시 백성들은 세자 광해군은 무너진 조선의 유일한 희망으로 칭송했다.

광해군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것은, 전란 이후 아버지 선조에게는 오히려 위협으로 작용했다. 권력에 대한 집착욕이 강했던 선조는, 임진왜란 기간 중 보여준 추태로 자신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진 반면, 광해군의 명망은 갈수록 높아지자 점점 노골적으로 아들을 질시하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 선조는 자신의 권위를 되찾고 광해군을 견제할 목적으로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였다. 또한 그동안 외교적인 관례로 이루어지던 명나라의 세자 책봉 승인이 정치적인 사정을 이유로 번번이 거부당하면서, 광해군은 후계자로서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불안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1602년, 선조는 사망한 의인왕후의 뒤를 이어 인목왕후를 새로운 계비로 맞아들인다. 당시 이미 50세를 넘긴 선조가 광해군을 대체하여 자신의 뒤를 이어 후사를 얻기 위하여 재혼을 서둘렀다고 보는 시각이 정설이다. 실제로 인목왕후는 선조와 혼인 이후 4년 만에 아들 영창대군을 낳는다. 이 무렵의 선조는 광해군이 세자의 자격으로 문안을 오는 것조차 노골적으로 역정을 내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은 비통한 심경으로 피를 토했다고 한다.

하지만 1608년 2월, 광해군에게 뜻밖의 반전이 찾아온다. 선조의 병이 급격히 위독해진 것. 영창대군은 아직 두 살에 불과했고, 선조는 끝내 광해군을 세자에서 몰아낼 만한 명분이나 결격사유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죽음을 앞둔 선조는 광해군에게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평생 아버지에게 끊임없는 정신적 학대를 당해오고도 한 마디 사과도 받지 못한 광해군으로서도,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보다 이복동생을 더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에 그동안 쌓인 분노가 더욱 폭발했다.

광해군은 16년간의 세자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지만, 왕세자 시절과는 180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랫동안 아버지 선조의 괄시와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광해군은 어느새 주변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광기 어린 성격으로 변했다.

광해군은 후계구도를 놓고 자신의 정적이 된 친형 임해군은 물론, 9살에 불과한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모두 유배보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유배지에서 의문의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영창대군의 생모 인목대비에게는 대비 칭호를 박탈하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하고 아우를 죽이다)'라는 심각한 정치적 오명을 쓰게 된다.

또한 왕권강화에 집착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의 후유증으로 아직 지쳐있던 백성들을 몰아쳐서 세금을 짜내고 대규모 궁궐공사를 강행했다. 무리한 행동으로 광해군에 대한 민심은 날이 갈수록 곤두박질쳤다. 연이은 옥사와 탄압으로 신하들도 모두 광해군에게 등을 돌리고 고립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광해군은 결국 왕위에서 폐위되고 유배된다. 1641년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66세의 나이로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한때는 누구보다 훌륭한 왕세자였지만, 정작 왕위에 오르고 난 후에도 '아버지가 준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왕의 묘호도 받지 못한 채 폭군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

한편 광해군을 몰아내고 권좌에 오른 인조 역시, 아들 소현세자와의 부자관계에서 비슷한 운명을 반복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인조 즉위 3년 만인 1625년에는 14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된다.

초기에 인조-소현세자의 관계는 선대의 선조-광해군과는 달리 매우 끈끈하고 안정적이었다. 소현세자는 정통성을 타고난 인조의 적장자였고 아버지의 신임도 두터웠다. 1627년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소현세자는 인조의 명령으로 분조를 이끌고 지방의 민심을 다독이기도 했다. 조선 역사상 단 2번뿐인 분조를 이끌었다는 것은 광해군과 소현세자의 공통점이다.

그런데 1636년, 병자호란의 발발은 이후의 조선 역사와 소현세자-인조의 관계를 뒤흔드는 전주곡이 된다. 청나라 대군의 침공으로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인조는 결국 이듬해인 1637년 청 황제에게 항복하고 직접 머리를 숙이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게 된다.

소현세자는 아버지와 함께 삼전도의 굴욕을 겪은 데 이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소현세자가 청나라로 떠나는 날, 인조는 아들 소현세자를 전송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현세자 일행은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생활을 지내면서도 청나라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소현세자는 세자라는 지위와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생계를 위하여 장사에 뛰어들었고, 의외로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조선과 청을 오가는 중개무역으로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게 된다.

또한 소현세자는 청에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하고는 농작물과 물품을 거래했다. 소현세자가 머물던 심양관은 어느새 일종의 국제무역시장으로 자리잡았다. 나라에서 버림받아 갈 곳이 없던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을 구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면서 소현세자는 세자로서의 본분도 잊지 않았다.
▲ 벌거벗은한국사2 광해군과 소현세자
ⓒ TVNSTORY
하지만 이때부터 소현세자와 인조 부자 간에는 서서히 갈등의 골이 쌓이고 있었다. 본인이 반정으로 집권했던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히지 않을까라는 불안감을 안게 됐다.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임시 귀국하였을 때, 인조는 소현세자와 단 한 번만 대면하고 그 이후 떠날 때까지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에 대한 의심이 쌓여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645년 2월, 소현세자가 약 8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고 조선으로 영구귀국한다.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을 통하여 청나라의 국력과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직접 확인했다. 실용적이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장점을 잘 수용하는 것이 조선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버지 인조의 생각은 달랐다. 인조에게 여전히 청나라는 자신에게 그저 치욕을 안겨준 '오랑캐의 나라'에 불과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가져온 청나라 황제의 선물인 벼루를 내던지며 역정을 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청나라를 바라보는 자세나 앞으로 조선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전혀 달랐다. 인조의 눈에 소현세자는 더이상 아들이 아닌, '정적이자 배신자'에 불과했다.

1645년 5월 21일, 소현세자가 돌연 세상을 떠난다. 공식적인 사인은 지병이었던 학질(말라리아)이었지만,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듯 의문스러운 시신의 상태로 인하여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지 불과 3개월 만의 일이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현세자 사후, 인조가 보인 반응이었다. 조선의 종법상 적장자가 먼저 사망하면 아버지 1년상을 치러야 했는데 인조는 단 30일 만에 상복을 벗고 장례절차로 간소화시켰다. 또한 인조는 소현세자의 치료에 관여한 의원들을 조사하려는 신하들의 요청도 거부했다. 이후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고,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들은 유배되어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해야 했다.

가족간의 오해와 갈등이 초래한 비극은 때로는 역사의 흐름까지 변화시키기도 한다. 세자 시절부터 남다른 역량을 인정받았던 광해군과 소현세자에게, 과연 아버지의 사랑과 지지가 있었더라면 두 사람의 인생과 그들이 왕위에 오른 이후, 조선의 역사까지도 많이 바뀌지 않았을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