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독에 묻혀있던 윤동주 시, 친구 덕에 알려진 사연
[오문수 기자]
▲ 윤동주 기념관에 세워진 여러가지 기록물들 |
ⓒ 오문수 |
시에 문외한인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윤동주다. 필자가 만주를 방문한 첫 번째 이유 중 하나는 윤동주를 제대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행과 함께 윤동주 생가를 방문해 옷깃을 여미며 그의 생애와 시세계를 돌아보았다. 이곳 윤동주 기념관에는, 윤동주가 태어나서 자라고 일본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의 생전 기록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 윤동주 기념관에 세워진 윤동주 상 모습으로 윤동주의 <서시>가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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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생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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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란 지명은 우리의 기구한 역사를 의미한다. 강을 건너면 '월강죄'란 죄목으로 사형까지 불사하는 가혹한 시절, 사람들은 두만강 사이에 있는 ' 사이섬(間島)'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몰래 배를 내어 강 건너 비어 있는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강만 건너가면 어찌나 비옥한 지 농사가 잘 되었다. 처음엔 그냥 두만강 이북 땅을 '간도'라고 불렀지만 나중엔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 두만강 이북을 '북간도'라고 불렀다.
1899년 2월 18일, 두만강변 회령과 종성에 거주하던 문병규,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의 네 학자들 가문에 속한 22개 집안 식솔 141명의 이민단이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넜다. 이들이 세운 마을이 명동촌이다.
김약연은 명동학교의 초대 교장이 됐고,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선친이다. 윤동주 아버지 윤석영은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사이다.
명동으로 이주한 이들은 각자 낸 돈의 비율에 따라 땅을 분배했다. 그런데 이들이 했던 일 중 가장 의미 있던 일은 '학전(學田)'이란 명목으로 걷은 교육기금이다. 이 기금은 명동학교의 밑거름이 됐다.
이들이 북간도 이민을 결심하게 된 동기는 아래 세 가지였다.
▲척박하고 비싼 조선 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좀 잘살아보자
▲집단으로 들어가 삶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자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르자
신학문에 눈뜬 명동 사람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힘을 실감한 명동 사람들은 유학을 가르치던 3개의 서재를 하나로 합친 후 '명동서숙'이란 신학문 교육기관으로 전환했다.
▲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이 다녔던 명동학교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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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명동의 여러 어른들 가운데서 윤하현 장로의 인물됨이 가장 컸었다. 동만(東滿- 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동부지역)의 대통령이란 별호까지 듣던 김약연 목사님보다 인물됨 자체로는 오히려 큰 분이었다. 워낙 도량이 크고 당당하신 분이었기에 학문이 전혀 없는 분이면서도 학자들의 마을인 명동에서도 크게 존경을 받으며 지냈고, 교회 장로로도 선출되었다. 그분 인물됨의 폭이 그토록 컸었으니 학문만 갖추었더라면 정말 큰일을 해냈을 분이었다."
3개월 간격 두고 태어난 뒤 19일 간격 두고 나란히 옥사
윤동주 생애에 특별히 주목할 일이 있다. 그것은 윤동주보다 석 달 앞서 윤동주 집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형인 송몽규의 존재이다.
2016년 영화 <동주>가 개봉한 뒤 알려지기도 했지만,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인 송창희는 처가에서 살았고 1917년 9월 28일에 송몽규가 태어났다.
▲ 한 집에서 석달 간격으로 태어난 송몽규와 윤동주는 평생을 같이한 친척이자 동지였다. 기념관에 재현해놓은, 윤동주와 송몽규가 같이 있는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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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기념관에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시절 독립운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죽어가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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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의 생활상과 가계도가 기록된 사진들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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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간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우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라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동지인 정병욱을 만나다
윤동주의 주옥같은 시는 하마터면 사장될 뻔 했다. 윤동주 시가 햇빛을 보게 된 건 친구 정병욱 덕인데, 운명적 만남이었다.
▲ 정병욱(오른쪽)이 윤동주의 시를 보관하지 않았더라면 윤동주의 시도 윤동주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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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하게 솟은 콧날, 부리부리한 눈망울, 한 일(一)자로 굳게 다문 입, 그는 한 마디로 미남이었다. 투명한 살결, 날씬한 몸매, 단정한 옷매무새, 이렇듯 그는 멋쟁이였다. 그렇지만 그는 꾸며서 이루어지는 멋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천성에서 우러나는 멋을 지니고 있었다."
창씨개명과 조선어 말살 정책으로 엄혹한 시절 둘은 함께 하숙했다. 하숙하는 동안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서시> 등 주옥같은 시를 썼고 정병욱은 언제나 윤동주 시인의 시를 최초로 읽는 독자였단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원고를 넘긴 때는 1941년 11월 20일 이후부터 1942년 2월의 일본으로 유학가려던 사이로 추정된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윤동주는 시집 세 권을 만들어 한 부는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게, 한 부는 자신이 일본으로 가지고 갔고 나머지 한 부는 정병욱에게 맡겼다.
1943년 여름 윤동주는 일본에서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고 정병욱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됐다.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 광양 망덕에 있는 정병욱 생가 모습. 정병욱의 어머니가 윤동주의 시를 보관했던 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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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병욱의 어머니가 윤동주 시를 보관했던 쌀 항아리 모습. 전남 광양 망덕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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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윤동주가 살던 시기 한국 동포들은 나라를 잃고 여기저기에서 멸시당하는 신세였다. 일제에 쫒겨 만주로 갔는데 중국 관헌이 멸시하고, 러시아 군인과 마적단까지 독립군들을 핍박했다.
시를 읽다가 끝까지 읽을 수 없던 이유는 일본 유학 당시 독립운동하다 체포되어 생체실험 대상이 되어 해방 직전에 세상을 떠난 윤동주의 슬픈 운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이 시속에서 보여주는 것은 끊임없는 자아성찰과 혐오, 연민, 후회 등이다. 동행했던 민주식 교수의 얘기다.
"윤동주 시는 부끄러움을 알자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주제인데, 작게는 나부터 크게는 대통령까지 다들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요. 경계가 무엇입니까? 만주에 온 동포들은 두만강을 폴짝 뛰어 건너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물리적 경계만이 아닌 마음의 경계를 허물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은, 어쩌면 남을 먼저 이해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뉴스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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