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어 말린 종이팩이 지구를 바꿀 수 있을까

느린IN뉴스 2026. 8. 2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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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시민들이 깨끗이 씻어 말려 내놓더라도 수거한 뒤의 과정과 연결되지 않으면 종이팩은 다시 쓰레기가 될 수 있었다.

시민이 종이팩을 씻어 말려 내놓더라도 지자체의 회수 체계와 선별장의 인력·설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재활용업체에 도착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시민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종이팩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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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바꾸는 종이팩 [2] 숲과나눔 '종이팩 컬렉티브', 변화를 만드는 '함께'의 힘

[느린IN뉴스]

"우리가 조금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다면."

이 물음을 가지고 2019년, 광주에서 종이팩을 모으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카페라떼클럽'은 카페에서 나온 종이팩을 따로 회수해 주민센터 수거보상제를 통해 재생화장지로 교환하고, 이를 지역사회에 기부하는 순환 모델을 만들었다. 첫해에는 카페와 베이커리 21곳에서 5주 동안 약 4천 개의 종이팩을 모아 화장지 120롤로 바꿨다. 이듬해에는 6개 마을, 50개 가게로 활동이 확대됐다.
▲  지난 2021년 카페라떼클럽이 운영한 종이팩 교환 부스.
ⓒ 카페라떼클럽
이 무렵 광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버려진 쓰레기의 행방을 묻고, 다시 자원으로 되돌리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민들의 아이디어를 지원해온 재단법인 숲과나눔 역시 종이팩 문제를 다루는 시민과 단체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종이팩을 모으는 시민이 늘어난다고 해서 재활용률까지 함께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종이팩이 다시 자원이 되려면 배출과 회수, 선별, 재활용의 모든 단계를 거쳐야 한다. 시민들이 깨끗이 씻어 말려 내놓더라도 수거한 뒤의 과정과 연결되지 않으면 종이팩은 다시 쓰레기가 될 수 있었다.

버릴 곳 없는 종이팩, 재활용률은 13%

종이팩은 우유나 주스, 두유 등을 담는 포장재로, 일반팩과 멸균팩으로 나뉜다. 주로 우유를 담는 일반팩은 종이 안팎을 폴리에틸렌으로 코팅해 만든다. 실온에서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두유나 음료 등에 사용되는 멸균팩에는 산소와 빛을 차단하기 위한 알루미늄층이 추가된다.

두 종류 모두 고급 천연펄프로 만들어져 화장지나 핸드타월, 종이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 폐지와 재질과 처리 공정이 달라 반드시 따로 모아야 한다. 종이류나 일반쓰레기가 아닌, 종이팩류로 따로 배출해야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종이류와 섞여 배출된 종이팩은 선별 과정에서 골라내기 어렵고, 오염되거나 찌그러지면 재활용되지 못한 채 소각되기도 한다.
▲  2003년부터 2022년까지 종이팩 출고량과 재활용 실적. 종이팩 재활용률은 2012년 32%에서 2022년 14%로 10년 사이 절반이 넘게 떨어졌다.
ⓒ 숲과나눔
2022년 기준 국내 종이팩 재활용률은 약 13%에 머물러 있었다. 일반팩만 보면 20%대였지만 멸균팩은 2%대에 불과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배달과 비대면 소비가 늘고, 실온 보관과 배송이 가능한 멸균팩의 사용량은 증가했지만 이를 회수하고 재활용하는 체계는 뒤따르지 못했다.

숲과나눔이 2024년 발간한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국내에 출고된 종이팩 약 7만5000톤 가운데 60%인 4만5300톤은 폐지와 섞여 배출됐다. 27%인 2만100톤은 종량제봉투에 버려졌고, 실제 재활용된 양은 1만톤으로 전체의 13.2%에 그쳤다. 출고된 종이팩의 80% 이상이 별도의 재활용 과정에 들어가지 못한 셈이다.

종이팩의 '뒷단'을 함께 보다

숲과나눔은 시민과 단체들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이들이 공통으로 부딪히는 한계를 확인했다. 시민사회는 지역마다 종이팩 분리배출과 회수 모델을 만들었지만, 수거한 종이팩이 선별과 재활용까지 이어지려면 지방자치단체와 생산기업, 회수·선별업체, 재활용기업 등 배출 이후의 과정에 관여하는 주체들도 함께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숲과나눔은 2023년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를 시작했다. 숲과나눔 허그림 캠페이너는 "2019년 이후 종이팩이 시민사회에서 활발하게 이슈로 떠올랐지만, 실질적으로 종이팩 재활용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며 "시민사회가 분리배출과 회수 모델을 많이 만들었다면 이제는 그 뒷단의 문제도 함께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재활용품의 분리배출과 회수·처리는 지자체장의 책임이다. 지자체가 주민들이 종이팩을 따로 버릴 수 있는 수거 체계를 만들고, 수거한 종이팩을 선별하거나 재활용업체에 전달해야 한다.

이후 선별과 재활용 단계에서는 산업의 문제가 더해진다. 재활용은 많은 부가가치를 내는 산업이 아니어서 수거량이 적거나 이동 거리가 멀면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통해 제품과 포장재를 생산한 기업에 재활용 의무를 부과하고, 생산자가 낸 분담금으로 회수와 선별·재활용을 지원하고 있다.
▲  숲과나눔 허그림 캠페이너가 종이팩 자원순환 시스템 마련을 위한 정책보고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느린인뉴스
허 캠페이너는 "산업계 전반이 바뀌지 않고 소비자에게 개인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종이팩의 재활용률을 높이려면 배출하는 시민뿐 아니라 회수와 선별, 재활용에 관여하는 주체들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각 단계에 참여하는 주체의 이해관계와 우선순위가 모두 다르다는 데 있다. 시민단체는 환경적 가치와 제도 개선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선별업체에는 수익과 비용이 걸려 있다. 지자체 공무원에게는 새로운 사업을 만드는 것보다 주민 불편과 민원을 줄이는 일이 더 시급할 수 있다. 생산기업과 재활용업체 역시 비용과 설비, 재생제품의 시장성을 따질 수밖에 없다.

허 캠페이너가 인상 깊게 본 곳은 서울 송파구의 한 선별장이었다. 이곳의 한 관계자는 작업자들에게 컨베이어 벨트 위로 1만원권과 5000원권, 1000원권이 지나간다면 무엇을 주울 것인지 묻곤 했다. 답은 '모두 줍는다'였다. 그에게 선별되는 재활용품도 마찬가지였다. 종이팩은 양이 적어 큰 수익을 내는 품목은 아니지만, 모으면 업체의 수익이 되는 자원이었다.

숲과나눔이 종이팩 문제를 '컬렉티브 임팩트' 모델로 해결하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맡고, 종이팩 재활용을 향해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숲과나눔은 사업 기간 동안 파트너 단체들과 함께 정부와 지자체, 생산기업, 회수·선별업체, 재활용기업 등의 관계자를 초청해 열 차례가 넘는 포럼을 열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겪는 문제와 이해관계를 듣고, 종이팩 자원순환에 필요한 변화를 함께 논의했다.

이후 종이팩 컬렉티브는 포럼에서 모인 의견을 바탕으로 ▲종이팩 별도 수거품목 지정 ▲지자체 수거 의무 강화 ▲재활용제품 시장 활성화 ▲재활용 인정 범위 확대 ▲분리배출 홍보와 인식 개선 등 다섯 가지 정책을 제안했다.

그중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시민들이 종이팩을 따로 버릴 수 있는 곳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분리수거 지침에서 종이팩은 '골판지 외 종이류'에 포함돼 있었다. 종이팩의 60%가 폐지와 섞여 배출되는 상황에서 재활용률을 높이려면 배출 단계부터 분리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했다.

시민이 모은 종이팩, 제도를 움직이다

이 같은 시민들의 요구는 제도의 변화로 이어졌다. 종이팩을 별도 수거품목으로 지정하는 방향으로 분리수거 지침 개정이 추진된 것이다.

정부는 당초 일부 지역에서 1년간 시범사업을 진행한 뒤 종이팩 별도배출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그러나 시민사회에서는 공동주택과 카페, 학교 등에서 이미 여러 해 동안 종이팩 수거 모델을 운영해왔다며 다시 시범사업을 거칠 필요가 있는지 문제를 제기했다. 시민들이 직접 종이팩을 모으며 별도배출의 가능성과 한계를 충분히 확인한 만큼, 그 경험을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시범사업 단계를 줄이고 전국 시행 시기를 앞당기기로 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오는 9월 개정된 분리수거 지침을 고시하고,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거쳐 10월부터 전국 공동주택을 중심으로 적용할 예정이다. 허 캠페이너는 "이러한 변화는 종이팩을 씻어 말리고 직접 수거해온 시민들과 파트너 단체들이 함께 만든 일"이라며 "시민들도 충분히 효능감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자원재활용 업체에서 수거된 종이팩을 광학선별기를 이용해 일반팩과 멸균팩으로 자동선별하고 있다.
ⓒ 김해시청
다만 앞으로 남은 과제들도 있다. 별도배출은 종이팩이 다시 자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후 종이팩이 재활용되기 위해서는 수거함에 담긴 종이팩이 폐지와 섞이지 않은 채 운반되고, 선별장에서 일반팩과 멸균팩으로 나뉘어 각각의 재활용업체까지 전달돼야 한다.

지구를지키는소소한행동 사회적협동조합이 지난 7월 발간한 '서울시 공공선별장 종이팩 회수·선별 실태조사 보고서'는 배출 이후에도 종이팩이 다시 쓰레기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조사 결과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15곳은 분리배출 지침에 종이팩을 별도 품목으로 규정하지 않고 있었다. 종이팩을 별도로 선별하는 공공선별장도 전체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고, 6개 자치구에서는 종이팩 선별량이 0톤으로 집계됐다.

지소행이 서울 시내 공공선별장 네 곳을 직접 조사한 결과, 종이팩 선별을 위한 별도의 매뉴얼을 갖춘 곳도 없었다. 폐지와 다른 재활용품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선별장에서 낱개로 흩어지거나 오염된 종이팩을 짧은 시간 안에 골라내기는 쉽지 않았다. 시민이 종이팩을 씻어 말려 내놓더라도 지자체의 회수 체계와 선별장의 인력·설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재활용업체에 도착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공동주택보다 배출량이 적고 수거 거점을 만들기 어려운 단독주택과 소규모 상가, 카페의 종이팩을 어떻게 모을지도 남은 과제다.

"나 하나쯤이야"에서 "나 하나부터"로

한국환경연구원이 매년 실시하는 국민환경의식조사에서는 환경친화적 행동을 우선한다는 시민이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경친화적 행동을 우선한다'는 응답은 2018년 70.5%에서 2024년 58.4%로 12.1%포인트 감소했다. 반면 '생활의 편리함을 우선한다'는 응답은 같은 기간 12%대에서 20%대로 증가했다.

환경을 위해 일상의 불편을 감수하려는 시민이 줄어든 셈이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지속해서 실천하는 환경 행동의 상위 두 가지는 모두 자원순환과 관련돼 있었다. 2024년 조사에서 79.8%는 장바구니를 이용한다고 답했고, 79.3%는 종이와 플라스틱, 병, 캔 등의 쓰레기를 깨끗이 씻어 분리배출한다고 답했다.
▲  지난해 9월 국회도서관 소강당에서 열린 '멸균팩 자원순환 활성화 방안 토론회' 현장 모습.
ⓒ 숲과나눔
종이팩 회수체계 개선방안을 연구한 배연정 서울대학교 그린에코공학연구소 실장은 공동주택 단지 내 전용 수거함을 설치하면 종이팩 재활용률을 현재보다 2~3배 높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 과정에서 시민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봤다.

시민의 참여가 중요한 이유는 종이팩을 더 많이 모을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지난해 9월 열린 토론회에서 배 실장은 "종이팩은 유가성이 낮고 생산량이 적어 정부 지원과 시민운동 없이는 사실상 재활용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수익만으로는 회수와 선별, 재활용에 필요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의 지원과 시민사회의 지속적인 요구가 함께 필요하다는 의미다.

허 캠페이너도 정부나 지자체 관계자들을 만나면 "시민들이 이 문제에 정말 관심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생산기업 역시 소비자의 여론과 선택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민의 관심과 요구는 정부와 지자체가 제도를 만들고 기업이 움직이는 근거가 된다는 설명이다.

외에도 시민들의 역할이 필요한 곳이 있다. 바로 수거한 종이팩으로 만든 재생제품이 다시 판매될 수 있도록 소비시장을 넓히는 일이다. 어렵게 종이팩을 모아 화장지나 판지 등으로 만들어도 이를 구매하는 곳이 없다면 재활용기업은 생산을 이어가기 어렵고, 수거와 선별도 지속되기 힘들다. 공공기관의 재활용제품 구매를 늘리는 것과 함께 시민이 재활용제품을 선택하는 일도 자원순환의 한 과정이다.

허 캠페이너는 "자원순환은 양질의 자원이 많이 모이고, 그 자원으로 만든 재생제품이 많이 팔려야 돌아간다"며 "시민들은 주로 배출과 회수에 참여하지만 재활용제품을 소비하는 것도 시민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  '종이팩은 종이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캠페인 홍보 포스터.
ⓒ 느린인뉴스
씻어 말린 종이팩이 지구를 바꿀 수 있을까. 종이팩, 그리고 자원순환만으로 지구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민의 실천만으로 재활용산업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종이팩 하나를 씻어 말리는 일은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바위로 계란 치기'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 하나쯤이야'가 아니라 '나 하나부터' 시작한 시민들의 행동은 끝내 제도를 움직였다. 이제 그 작은 실천이 실제 자원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 생산기업과 재활용산업이 각자의 책임으로 답할 차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느린인뉴스에도 실립니다.(https://www.slowlearnernew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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