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비둘기는 핵시설 서성였다…007 뺨치는 '비밀 첩보원'들
지난 4월(현지시간) ‘푸틴의 비밀 첩보원’으로 의심받았던 벨루가(흰돌고래) ‘발디미르’(Hvaldimir)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동물 첩보원’의 존재가 재조명됐다.
발디미르는 2019년 노르웨이 북부 핀마르크 인근 해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발견 당시 목과 가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장비’로 표시된 수중 카메라용 띠를 두르고 있어 ‘러시아 스파이’란 의심을 받았다.
발디미르가 5년 뒤 돌연 숨진 채 발견되자 러시아의 첩보용 동물에 대한 의문이 더욱 증폭된 것이다. 영화 ‘007’의 제임스 본드 뺨치는 ‘동물 첩보원’, 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1차 대전 독일군, 카메라 장착한 비둘기 활용
발디미르처럼 카메라를 장착한 동물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처음 등장했다. 당시 독일군은 정찰 목적으로 적군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소형 카메라를 비둘기 몸에 묶어 처소나 부대로 보냈다.
냉전 시기인 1960년대엔 미국과 소련이 돌고래와 바다사자 등을 기뢰제거나 적진 탐지 등 군사 용도로 훈련받는 개체로 활용하며 군사작전에 본격 투입했다.
2014년 크림 반도 강제 합병 이후엔 러시아군이 돌고래를 훈련한 정황이 지난해 4월 미국 민간 위성기업 막사 테크놀로지의 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됐다. 우크라이나 해군 특수부대원들의 수중 침투를 막기 위한 취지라는 게 미국 해군 연구소(USNI)의 분석이다.
분쟁이 잦은 중동 지역에서도 동물을 활용한 정찰 활동이 목격되곤 한다. 이란 국영통신IRNA과 범아랍권 독립 일간 알쿠드스에 따르면 2007년 도청장치를 지닌 다람쥐 14마리, 2008년엔 핵 시설 근처에 서성이던 비둘기 2마리가 포획됐다.
2015년엔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는 영상 카메라 등 감시용 도구와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를 장착한 돌고래를 포획했다. 이스라엘 정부의 감시 임무를 수행했다는 게 하마스의 주장이다. 이스라엘은 돼지나 아프리카 대왕 캥거루쥐를 지뢰 탐지용으로 기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누명 쓴 채 억울한 옥살이도
첩보활동에 동물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다보니 타국의 첩보원이란 누명을 쓴 동물들도 생겨났다. 지난해 6월 인도 뭄바이의 한 항구에서 중국어가 적힌 고리가 다리에 묶인 채 발견된 비둘기가 포획됐다. 이 비둘기는 ‘중국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약 8개월간 현지 동물병원에서 구금됐다. 다만 현지 경찰의 조사 결과 대만에서 탈출한 경주용 새로 밝혀져 무사히 풀려났다.
불가리아 태생의 흰목대머리수리 ‘넬손’은 2019년 초 내전 상황이던 예멘 남서부 타이즈에서 정부군에게 잡혔다. 다리에 부착된 인공위성위치정보(GPS) 발신기 때문에 후티 반군의 정보 수집용 조류로 오인됐다.
예멘인들은 억류돼 있는 넬손의 사진과 소식을 자연보호단체 ‘야생동식물기금’(FWFF)에 알렸고, FWFF는 직접 예멘 대사관을 만나 스파이가 아니라고 설득했다. 사연이 알려지자 프랑스·아일랜드의 동물보호 활동가들도 넬손의 '석방'을 위해 힘썼다. 결국 5개월가량 지난 2019년 4월 넬손은 자유의 몸이 됐다.
동물을 활용하는 이유
첩보원으로 주로 활용되는 동물은 하늘을 나는 조류, 바다를 오가는 해양 포유류, 몸집이 작은 육지 포유류 등이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제첩보박물관은 동물을 활용하는 이유로 “(인간보다) 시선을 끌지 않는다”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금지된 구역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발간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 ‘자연의 첩보원, 동물 첩보원’은 이들을 ‘완벽한 자연의 첩보원’(perfect natural spies)이라고 규정하면서 “첩보 과학 기술을 개선 시키는 데에도 향상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제공해준다”고 평가했다.
“동물 학대” 논란 이후 ‘동물 첩보원’의 미래는
동물 학대란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1964년 고양이 귓속에 도청장치, 가슴에 배터리, 척추엔 안테나 삽입한 CIA의 ‘어쿠스틱 키티’(Acoustikitty) 프로젝트가 2001년 CIA 기밀문서 해제로 알려지자 미국 동물권 단체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PETA)은 입장을 통해 “가장 말도 안 되는 동물 학대”라며 이들을 활용한 프로젝트를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2000년대부터는 동물보다 인공지능(AI) 첩보용 로봇 개발에 치중하는 모습이다.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는 2015년 과학전문기자 에밀리 앤디스를 인용해 2006년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고등연구계획국이 과학자들에게 감시 장비나 무기를 실을 수 있는 곤충 사이보그(Insect Robot)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해 달라고 주문한 사실을 보도했다.
최근 10년간 곤충의 뇌에 전기자극을 줘 멈춤, 출발, 선회 등의 명령을 내리고 작업을 미세 조정할 수 있는 상태까지 기술을 발전시켰다는 내용이다. 애벌레 또는 번데기 단계에서 곤충의 체내에 작은 장치를 이식할 경우, 장치주위로 재생조직이 발달해 상처를 치유하고 안정적인 구조가 형성되면서 신경세포에 전기자극을 주게 되면 곤충의 이동을 제어할 수 있다는 논리다.
국내에선 장수풍뎅이 날개 원리를 모사한 'KU비틀'이라는 비행 로봇이 개발됐다. 로봇 개발에 참여한 건국대 박훈철 교수 연구팀에 따르면 날개가 장애물에 부딪혀도 추락하지 않고 계속 날아가는 게 로봇의 특징이다. 첩보원 역할 투입까지 이뤄지진 않았지만, 활용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한지혜 기자 han.jeeh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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