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동납치범이 아닙니다”… 아동반환청구 소송 급증
미국 주법원 이어 국내 법원도 美 남편에 반환 결정
전문가 “재판부가 아이 복리부터 적극 고려해야”
지난 6일 서울 외교부 청사 앞에서 이모(39)씨가 대형 팻말을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팻말에는 ‘보스턴 영사관이 나를 아동 탈취범으로 만들었다’ ‘내 아이를 지킨 게 죄가 되느냐’ 등의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씨는 2019년 11월 미국인 남편 A씨(50)와 미국에서 결혼했다. 두 사람은 2021년 8월 한국으로 들어와 부산에 있는 이씨 명의 아파트에 살았다. 2022년 6월 둘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이씨 가족은 2022년 11월 만료된 이씨의 미국 영주권 연장을 위해 지난해 2월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씨의 영주권 발급은 미뤄졌다. 생활비도 떨어지고 부부 사이에 갈등이 자주 빚어졌다. 이씨에 따르면 남편은 미국에서 직업을 갖지 못해 부인인 이씨에게 생활비를 벌어오라고 강요했다고 한다.
반면 남편 측은 아내인 이씨에게 일을 강요한 사실이 없으며, 본인은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하며 소득 활동을 지속했다는 입장이다. 남편 측 법률대리인인 황윤정 로이어황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이씨의 남편은 지속적으로 생계 활동을 지속했고, 이씨가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다했다”고 반박했다. 이어 “남편 입장에선 갑자기 아이를 빼앗긴 셈”이라며 “남편 측은 면접 교섭이라도 하려 했는데 상대인 이씨 측이 그마저 거부했다”고 강조했다.
결국 남편이 이혼소송을 준비하자 이씨는 남편을 미국에 둔 채 아들과 함께 지난해 8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씨가 본인의 동의 없이 아들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났다며 미 매사추세츠 주 법원에 이혼 및 임시양육권 지정을 신청했다. 법원은 지난해 8월 말 이씨가 아들을 반환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남편은 국내 가정법원에도 아동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씨는 지난 7월 31일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미국인 남편에게 아들을 반환하라는 취지의 2심 판결을 받았다. 1심 판결도 같은 내용이었다.
현재 26개월인 아들은 엄마의 보호가 절실한 상태라고 이씨는 호소했다. 그러나 국내 1·2심 재판부는 이씨 남편이 미국에서 아들을 충분히 양육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 이씨 주장대로 이씨의 남편이 미국에서 소득 창출 활동을 하지 않는 상황이 아들에게 중대한 위험을 초래하지는 않는다고 봤다.
조모(43)씨도 이씨와 비슷한 사례다. 조씨는 2021년 4월 한국 대법원에서 아이를 미국에 있는 남편에게 반환하라는 판결을 확정받았다. 조씨 자녀는 24시간 보살핌이 필요한 ‘디죠지증후군’이라는 선천적 장애를 갖고 있다.
디죠지증후군은 22번 염색체 결손으로 나타나는 희귀 질환으로, 섭식 장애 등으로 인해 심각한 면역력 저하를 일으킬 수 있는 질병이다. 조씨는 이미 한국에서 자녀가 계속 치료를 받아왔고, 관련 치료비도 미국보다 한국이 훨씬 저렴하다고 법원에 호소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아이의 성장 및 건강상태는 언어발달지연 외에는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조씨는 이에 대해 “판결문의 가장 큰 문제는 아이의 선천적 질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아이에게 어떤 선택이 가장 이익이 될지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해외에 있는 배우자가 국내에서 자녀를 양육하는 남편이나 아내에게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아동반환청구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국제결혼 증가 영향으로 분석된다.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2019년 7건 접수된 아동반환판결 가운데 2건이 인용됐다. 지난해에는 19건이 접수됐으며 8건이 인용됐다.
아동반환 청구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은 국제 협약인 ‘헤이그 아동반환협약’에 따라 내려진다. 헤이그 아동반환협약은 1980년 아동이 불법적으로 다른 국가로 이동 또는 유치되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제정됐다.
한국은 최근까지 해당 협약 미이행 국가로 분류됐다. 이른바 ‘존 시치’ 소송 이후 협약 이행을 위한 규정이 적용됐다. 미국인 존 시치(54)씨는 2022년 국내에 있는 한국인 아내를 상대로 아이들을 돌려달라며 아동반환청구를 신청해 승소했다. 그러나 엄마와 함께 있던 아이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길 거부했다. 아이가 거부하면 강제로 외국으로 데려갈 수 없도록 규정한 한국 대법원 예규에 따라 아이들은 한국에 머물렀다.
이후 미국은 헤이그 아동반환협약 미이행 국가로 한국을 지정했다. 한국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예규를 수정했다. ‘아동이 거부할 시 송환을 강제할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이 같은 예규는 지난 4월부터 적용됐다. 이 덕분에 시치씨는 지난 4월 15일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법조계에선 국내 법원의 아동반환 판결이 법리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아동반환 판결은 기본적으로 원래 아이가 거주하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라며 “(아이를 반환하라는 판결을 받은 사람 입장에선) 아이를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동반환판결은 양육권을 판단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이 판결로 양육권을 박탈당하는 게 아니며, 아동반환판결 이후 양육권에 대한 본안 소송을 별도로 진행하면 된다는 얘기다.
그러나 국내 재판부가 헤이그 아동반환협약에 근거해 사실상 기계적으로 아동의 거취를 결정하는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동에게 미치는 심리적 영향뿐 아니라 양육 환경 등 실질적 이익 유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동훈 법무법인 명천 변호사는 “우리나라 재판부는 아동 복리보다 미국 법원 판결을 우선해 기계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며 “법원이 적극적으로 아이의 복리를 광범위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헤이그 협약 남용을 경계하는 국제적인 흐름도 감지된다. 지난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국제사법회의 포럼에선 헤이그 협약과 관련해 ‘어머니들이 자신과 자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기관들로부터 너무 자주 버림을 받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호주 정부는 2022년부터 협약에 따라 아동을 데려갈 부모의 가정폭력 및 아동학대 혐의 등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도록 법원에 요구하는 내용의 법안을 시행하고 있다.
한웅희 기자 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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