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화재 5분만에 구청장 나섰다…이 낯선 모습이 뼈아픈 이유 [안전 국가, 길을 찾다]
지난 2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수서역.폭음과 함께 승강장에 있는 열차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졌고 승강장 문에서 승객 250명이 쏟아져 나왔다. 초기대응팀이 대피로를 안내하고, 소방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는 동안 경찰과 군부대는 현장을 포위하고 방화 용의자를 찾기 시작했다. 해당 훈련을 포함해 강남구청 주도로 열린 2022년 재난대응 안전한국 훈련엔 경찰, 소방, 군부대와 인근 병원 등 18개 기관 495명이 참여했다.
훈련 시나리오에서 두드러진 것은 구청장의 ‘현장 콘트롤타워’ 역할이었다. 구청장은 사고 발생 약 5분 후 긴급 상황판단회의를 열어 강남구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했다. 사고 10분 후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했고 16분 후엔 통합지원본부를 설치해 현장 상황 대응에 대한 총괄 지휘에 나섰다. 이 낯선 모습이 법에 따른다면 재난 발생시에 당연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역할이다. 재난안전법은 재난 발생시 지방자치단체장이 ‘현장 지휘관’ 역할을 맡도록 설계돼 있다. 재난관리책임기관인 지자체의 장은 평시엔 지역 안전관리위원장으로서 지역별 재난·안전관리에 관한 사항을 심의·조정하고, 재난이 발생했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는 즉시 예방 및 피해 축소를 위한 응급조치에 나서고 관계기관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진다.” (재난 및 안전법 제4조 1항)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법은 공염불이었다. 서울 한복판 노상에서 158명이 숨을 거두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지방자치단체장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3만 인파를 등지고 경남 의령을 방문한 뒤 이태원 인근 자택으로 곧장 귀가했다. 상황 관리를 위한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사고 2~3일 전 열렸던 대책회의와 관계기관 간담회엔 모두 불참했다. 박 구청장은 당초 참사 발생 후 열린 구청 비상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주장했으나, 이 역시 거짓말로 밝혀졌다.
용산구의 한 안전관리위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안전관리위원회 회의는) 분기에 한 번 정도 열렸다”며 “(핼러윈 관련) 논의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일 사고 발생 전 이태원 거리에 나간 구청 공무원은 두 명의 당직 근무자가 전부였다. 사전 대책회의에서 구청의 관심은 쓰레기 처리와 불법 전단지 등에 쏠려 있었다. 다른 기관이 언급한 인파 운집과 교통 혼란 가능성에 관한 내용은 이 두 명의 당직자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구청 관계자는 “당직 선 사람들이 (회의 내용을) 하달 받을 일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사고 전 경찰 주도로 열린 상인연합회 등과의 간담회에도 자원순환과 공무원만이 참석했다. 이마저도 “구청에 참석 요청도 없었는데 자발적으로 홍보 차 참석한 것이다. 안전 문제는 경찰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게 구청 관계자의 말이다.
박 구청장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돼 수사를 받고 있다. 성난 법조계에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될 소지도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 구청장이 ‘유죄’로 판명된다면 반복되는 대형 인명 사고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개념뿐인 지자체 재난 대응 책임
재난 대응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위상이 강화된 건 세월호 참사 이후다. 2015년 수립된 제3차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에 따라 중앙 콘트롤타워(중대본)와 현장 콘트롤타워(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명확해졌다. “지방 정부는 긴급 상황과 재난에 대한 1차 방어선”이라고 규정한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재난 대응 가이드라인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변화였다. 그러나 지자체들의 재난대응 역량은 개념 변화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지자체 재난안전관리 실무자·관리자 대상 의무교육 대상에서 지자체장은 제외돼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 재난관리청(FEMA)에서 지자체장을 위한 현장 훈련 코스도 운영하지만, 국내엔 이 같은 교육·훈련이 전무했다. 행정안전부 주최로 매년 지자체들이 참가하는 안전한국훈련이 진행되지만, 그동안은 화재와 풍수해 등 자연재난 위주여서 인파 사고 등 사회재난은 관심 밖이었다. 행안부 관계자는 “지자체는 (재난 대비) 훈련 역량이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단순한 훈련만 계속했다”고 말했다. 용산구청엔 지난해 기준 방재안전직 정원이 1명뿐이었다. 구청에 전문 인력도 없다는 얘기다. 재난 관리와 관련한 행안부의 관리·감독도 느슨한 편이다. 실제로 2020년 초~2022년 10월 말 재난관리책임기관에 대한 행정안전부 안전감찰 결과, 재난관리 의무를 위반해 행안부가 처분을 요구한 1782건 중 징계 요구 처분은 28건에 불과했다. 기관 경고 처분은 고작 3건이었다.
“책임·권한 명확히 하고 역량 키워야”
이병준·나운채·최서인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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