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화재 5분만에 구청장 나섰다…이 낯선 모습이 뼈아픈 이유 [안전 국가, 길을 찾다]

이병준, 나운채, 최서인 2022. 11. 3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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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오후 3시, 서울 강남구 수서역.폭음과 함께 승강장에 있는 열차에서 불꽃과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승객 대피 안내 방송이 역사에 울려 퍼졌고 승강장 문에서 승객 250명이 쏟아져 나왔다. 초기대응팀이 대피로를 안내하고, 소방이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는 동안 경찰과 군부대는 현장을 포위하고 방화 용의자를 찾기 시작했다. 해당 훈련을 포함해 강남구청 주도로 열린 2022년 재난대응 안전한국 훈련엔 경찰, 소방, 군부대와 인근 병원 등 18개 기관 495명이 참여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SRT수서역에서 열린 2022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에서 열차에 화재가 발생한 사고 상황을 가정, 소방대원들이 승객을 구조하고 있는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지난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SRT수서역에서 열린 2022 재난대응 안전한국훈련에서 당국 관계자들이 현장사고수습본부를 운영하고 있는 모습. 이번 훈련은 지하2층 SRT수서역에 정차한 열차에서 방화 추정 화재와 역 앞 전기차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 상황을 가정해 열렸다. 뉴스1

훈련 시나리오에서 두드러진 것은 구청장의 ‘현장 콘트롤타워’ 역할이었다. 구청장은 사고 발생 약 5분 후 긴급 상황판단회의를 열어 강남구 재난안전대책본부를 구성했다. 사고 10분 후 대책본부 회의를 주재했고 16분 후엔 통합지원본부를 설치해 현장 상황 대응에 대한 총괄 지휘에 나섰다. 이 낯선 모습이 법에 따른다면 재난 발생시에 당연한 지방자치단체장의 역할이다. 재난안전법은 재난 발생시 지방자치단체장이 ‘현장 지휘관’ 역할을 맡도록 설계돼 있다. 재난관리책임기관인 지자체의 장은 평시엔 지역 안전관리위원장으로서 지역별 재난·안전관리에 관한 사항을 심의·조정하고, 재난이 발생했거나 그럴 우려가 있을 때는 즉시 예방 및 피해 축소를 위한 응급조치에 나서고 관계기관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이태원 참사 이후 한 달이 지난 2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인근 참사 현장에 추모 꽃과 음식 등이 놓여 있다. 뉴스1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재난이나 그 밖의 각종 사고로부터 국민의 생명·신체 및 재산을 보호할 책무를 진다.” (재난 및 안전법 제4조 1항)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법은 공염불이었다. 서울 한복판 노상에서 158명이 숨을 거두는 상황이 끝날 때까지 지방자치단체장의 존재는 무의미했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13만 인파를 등지고 경남 의령을 방문한 뒤 이태원 인근 자택으로 곧장 귀가했다. 상황 관리를 위한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사고 2~3일 전 열렸던 대책회의와 관계기관 간담회엔 모두 불참했다. 박 구청장은 당초 참사 발생 후 열린 구청 비상 대책회의에 참석했다 주장했으나, 이 역시 거짓말로 밝혀졌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용산구의 한 안전관리위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안전관리위원회 회의는) 분기에 한 번 정도 열렸다”며 “(핼러윈 관련) 논의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일 사고 발생 전 이태원 거리에 나간 구청 공무원은 두 명의 당직 근무자가 전부였다. 사전 대책회의에서 구청의 관심은 쓰레기 처리와 불법 전단지 등에 쏠려 있었다. 다른 기관이 언급한 인파 운집과 교통 혼란 가능성에 관한 내용은 이 두 명의 당직자에게도 전달되지 않았다. 구청 관계자는 “당직 선 사람들이 (회의 내용을) 하달 받을 일이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사고 전 경찰 주도로 열린 상인연합회 등과의 간담회에도 자원순환과 공무원만이 참석했다. 이마저도 “구청에 참석 요청도 없었는데 자발적으로 홍보 차 참석한 것이다. 안전 문제는 경찰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게 구청 관계자의 말이다.

박 구청장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돼 수사를 받고 있다. 성난 법조계에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될 소지도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박 구청장이 ‘유죄’로 판명된다면 반복되는 대형 인명 사고에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개념뿐인 지자체 재난 대응 책임


지난달 29일 당시 서울 용산구 이태원 압사 참사 현장의 모습. 김남영 기자
전문가들은 지자체장은 현장 지휘관으로 명명돼 있을 뿐 실질적인 권한이 적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지자체장이 경찰 한 명도 지휘할 권한이 사실상 없다”며 “경찰은 경찰서장이, 소방은 소방서장이, 자치단체 공무원은 자치단체장의 지시에 따라 따로 움직이는 구조다. 어느 누구도 전체를 통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자치경찰제가 시행됐지만 자치·국가경찰의 구분은 개념적으로만 존재할 뿐 사실상 경찰서장에게 보고하고 그 지휘에 따라서만 움직이게 되어 있다. 소방은 국가직화되면서 지휘 및 보고체계가 지자체장과 소방청장으로 이원화돼 있다.

재난 대응에서 지방자치단체의 위상이 강화된 건 세월호 참사 이후다. 2015년 수립된 제3차 국가안전관리기본계획에 따라 중앙 콘트롤타워(중대본)와 현장 콘트롤타워(지방자치단체)의 역할이 명확해졌다. “지방 정부는 긴급 상황과 재난에 대한 1차 방어선”이라고 규정한 미국 연방재난관리청(FEMA)의 재난 대응 가이드라인 등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춘 변화였다. 그러나 지자체들의 재난대응 역량은 개념 변화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지자체 재난안전관리 실무자·관리자 대상 의무교육 대상에서 지자체장은 제외돼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 재난관리청(FEMA)에서 지자체장을 위한 현장 훈련 코스도 운영하지만, 국내엔 이 같은 교육·훈련이 전무했다. 행정안전부 주최로 매년 지자체들이 참가하는 안전한국훈련이 진행되지만, 그동안은 화재와 풍수해 등 자연재난 위주여서 인파 사고 등 사회재난은 관심 밖이었다. 행안부 관계자는 “지자체는 (재난 대비) 훈련 역량이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단순한 훈련만 계속했다”고 말했다. 용산구청엔 지난해 기준 방재안전직 정원이 1명뿐이었다. 구청에 전문 인력도 없다는 얘기다. 재난 관리와 관련한 행안부의 관리·감독도 느슨한 편이다. 실제로 2020년 초~2022년 10월 말 재난관리책임기관에 대한 행정안전부 안전감찰 결과, 재난관리 의무를 위반해 행안부가 처분을 요구한 1782건 중 징계 요구 처분은 28건에 불과했다. 기관 경고 처분은 고작 3건이었다.


“책임·권한 명확히 하고 역량 키워야”


이태원 참사 한 달여 가까이 된 27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현장에서 시민들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재난 대응에서 지자체장의 권한과 책임을 실질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현장 초동 대응 후 재난 대응 체계가 돌아가기까지 시차를 줄이려면 현장에서의 상황 판단과 보고가 더 빠르게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지자체장에게 명확한 권한을 줘 지역 소방·경찰 등 자원을 총괄적으로 동원·조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성용 교수 역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미국처럼 시장 등 자치단체장이 경찰과 소방, 자치단체를 한꺼번에 지휘하고 현장에서 통제를 하는 것”이라며 “최소한 광역자치단체 정도 규모에서 현장 지휘와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문현철 숭실대 재난안전관리학과 교수도 “중요한 것은 기초지자체가 초도 단계에서 (재난 대응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이라며 기초단체장들로 하여금 재난안전 전문교육을 필수로 이수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준·나운채·최서인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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