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돌변한 미군의 폭격...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걸까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 2024. 10. 2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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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40] 폭격

[윤태옥(답사 여행객)]

내가 휴전선 답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지인 한 사람이 굳이 38선이 지나는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의 영중교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학자만큼 역사에 밝은 사람이라 한국전쟁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내게 전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것은 일반화된 지식이 아니라 그의 가족이 당한, 아주 구체적이고 참혹한 전쟁이었다.

"선친은 38선이 지나가는 양문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이 바로 들이닥쳤고 선친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 대열을 이탈해 고향의 동굴에 숨었다. 곧이어 국군이 돌아왔고 이번에는 국군의 보급대로 차출돼 집을 떠나야 했다. 직계 가족들을 종친이 있던 포천군 군내면 유교리로 피란을 보내고 자신은 연천 고랑포구와 황해도 곡산에서 보급대원으로 복무했다.

참극의 하나가 이때 벌어졌다. 유교리 일대를 미 공군이 폭격한 것이다. 온 동네의 집이란 집은 깡그리 부서지고 불에 탔다. 몸을 숨길 만한 큰 나무들까지도 폭격을 당했다. 말 그대로 초토화(焦土化), 대지 자체를 불로 태워버린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 부인과 네 자녀 등 아홉 식구가 떼죽음을 당했다. 폭격할 때 집 밖에서 놀던 어린 딸 하나만 무사했다. 1951년 4월의 일이었다. 지금도 음력 3월 23, 25, 27일에 제사를 지낸다."

미군 참전 초기의 폭격으로 인한 사건의 하나는 1950년 7월의 노근리 학살이다. 앞의 글 제24화 "도망가는 한국인에 공중폭격... 잊지 말아야 할 미군의 만행"에서 노근리 사건의 현장을 찾아간 바 있다. 노근리 사건의 전반은, 미군이 지시하는 대로 경부선 철로를 따라 피란을 가던 민간인 수백 명이 느닷없는 미 공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후반은 폭격을 피해 철교 아래 굴다리에 피했으나 이번에는 지상의 미군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학살한 사건이다.

그나마 한국전쟁 초기라서 지상의 미군조차 걷잡을 수 없이 밀리는 급박한 전황이었고, 인민군에 관한 정보도 부족해 발생한 오폭 또는 과잉 폭격이라는 해명이 따라붙기는 했다. 일부 그런 측면도 없지는 않다. 육안으로 민간인을 남북으로 구분할 수 없었고, 피란 행렬을 타고 북한군 일부가 미군 후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우려할 수 있었다.

이런 해명을 어느 정도는 수용한다고 해도 1951년 4월의 포천 유교리 폭격은 영동 노근리 폭격과 너무나 유사한 동시에 뭔가가 꽤 달랐다. 노근리와 유교리의 폭격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 지는 내가 답사를 하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됐다. 그것은 <폭격>이라는 묵직한 두 글자 한 단어를 제목으로 하는, 김태우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저서였다.

운명의 날
 1950. 8. 11. 미 전투기들이 북한군 진지에 무차별로 폭격하고 있다.
ⓒ NARA/박도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쟁수행 방식을 급격하게 변경하는 중요한 명령을 하달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미 공군의 폭격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김태우 교수는 그날을 '운명의 날'이라고 칭했다.

그 이전에 미 극동공군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그랬던 것처럼 B-29 중폭격기의 소이탄과 전폭기의 네이팜탄으로 북한의 도시들을 완전히 파괴하고 싶어 안달했으나 그러질 못했다. 공군의 핵심 지휘관들은 태평양전쟁을 포함해 아시아 지역에서 경력을 쌓은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원자폭탄을 포함해서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무차별 집중폭격이 적에게 안겨주는 군사적 심리적 충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정책과 그에 따른 맥아더의 지침은 군사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이었다. 실제 전장에서 말 그대로 정밀한 것은 아니지만.

운명의 날 이틀 전인 11월 3일만 해도 맥아더는 신의주를 불태워버리자는 스트레이트마이어 미 극동공군 사령관의 강력한 건의를 승인하지 않았다. 다만 시험 삼아 청진과 강계를 폭격해 보라는 부분적인 재가를 했을 뿐이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9월 26일 맥아더에게 38선 돌파를 허용하면서도 전술목표 공격에만 집중(정밀폭격)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하면서, 전쟁 후에는 자신들이 파괴한 북한의 많은 시설에 대해 복구책임을 안게 된다는 것을, 전쟁 지휘부는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 폭격과 같이, 북한의 도시 전체를 통째로 불태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상할수록 적의 후방 지역은 더욱 축소되면서 미 공군은 전략폭격을 가할 만한 목표 자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석 달 동안의 폭격으로 북한 지역의 군사적 목표는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 맥아더는 2개의 B-29 중폭격기 전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방안을 승인한 게 바로 10월 25일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시작해 11월 5일까지 계속된 중국군의 1차 공세에서 미군은 참전 이후 최대의 패배를 당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저지른 자신의 오만과 오판을 일거에 회복하려는 듯 11월 5일 초토화 정책이라는,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완전히 다른 작전을 하달한 것이었다. 이에 스트레이트마이어는 세밀한 작전 명령서를 작성해 맥아더의 재가를 받아 자신이 지휘하는 제5공군사령관과 폭격기사령관에게 하달했다.

작전명령은 도시와 마을(City and Village)을 포함한 북한의 모든 것은 군사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폭격 목표로 정당화되는 군사시설이라고 규정했다. 폭격수행 시점에 적군이 없는 민간인 지역조차 언젠가는 적군의 은신처로 이용될 수도 있으므로 사전에 모두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비인도적인 민간지역의 사전폭격까지 지시한 것이다.
 1950. 11. 6. 미 공군 폭격기의 집중 투하로 잔해만 남은 흥남비료 공장
ⓒ NARA/박도
말 그대로 초토화였다.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의 수풍댐과 그 외의 한반도 내 수력발전소, 그리고 소련과 국경으로 접하고 있는 나진시만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작전명령서는, 미국 정부가 그동안 표면적으로 견지해 오던 전술목표에 대한 정밀폭격이란 정책을 벗어나지 않는 것처럼 기교를 부려서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상부의 정밀폭격 정책을 폐기한 꼴이었다. 물론 워싱턴은 그것을 묵인하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11월 5일이었지만 실제 초토화 폭격은 이틀 전인 11월 3일 시작됐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대로 맥아더는 스트레이트마이어의 신의주 폭격 주장을 불허하면서 시험 삼아 강계와 청진을 폭격해 보라고 허락했기 때문이다.

10월 25일 이후 열흘 동안 쉬던 폭격기사령부의 B-29 중폭격기들은 11월 3일 파괴폭탄 대신 소이탄을 가득 적재하고 출격했다. 애초 강계를 폭격하려고 했으나 기상이 좋지 않아 청진으로 바꿨다. 24대의 B-29가 레이더폭격으로 소이탄을 퍼부었다. 청진은 불바다가 됐다. 다음날 정찰비행대는 폭격 이후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도 다수의 대형 화염에 휩싸여 있다고 보고했을 정도다.

11월 4일 강계를 폭격했다. 단 하루 단 한 번의 폭격으로 도심이 폐허가 됐다. 극동공군은 기자들에게 "강계의 군수품 집적소, 교통 중심지, 고위 사령부의 65%가 소이탄 공격에 의해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촬영해 온 사진을 보면 그저 강계시의 광범위한 인구밀집 지역을 완전히 파괴해 도시를 마비시킨 것이었다.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이틀에 걸친 시험폭격이 한국전쟁 최초의 B-29 소이탄 대량폭격이다.

스트레이트마이어가 줄곧 주장하던 신의주 폭격은 11월 8일 감행했다. 압록강 철교 끝부분을 포함한 북한의 국경 지역과 신의주 시내를 폭격한 것이다. B-29 중폭격기 78대가 출격했다. 70대는 소이탄으로 신의주 시내를, 6대는 파괴폭탄으로 압록강 철교를 공격했다. 2대는 레이존 폭탄으로 신의주 동쪽 복선 철도교량을 폭격했다. 하루 만에 640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도시 거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했다.

미 공군은 폭격 후의 정찰을 통해 신의주시 184만 ㎡ 가운데 약 110만 ㎡ 이상이 완전히 파괴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하루 8만5000발의 소이탄이 투하됐다. 건물 한 채당 평균 6.07발, 한 사람당 평균 0.67발의 소이탄이 투하된 것이다.

이날 미국 극동공군은 도시의 90%가 파괴됐으며 군사적 성격을 지닌 목표물만 공격했다고 주장했다. 모든 민간시설은 군사적으로 언젠가 이용될 수 있으니 군사적 목표라고 작전명령에 규정했으니 그들만의 말로는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신의주의 폭격 현장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짓말이었다.

북한에 의하면 신의주에는 1950년 7월 1만4000호의 가옥에 12만6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북한의 주장을 액면대로만 수용하기는 어렵지만 신의주에는 된장, 고추장, 두부, 신발, 성냥, 소금, 젓갈 등의 경공업 공장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1월 8일 폭격으로 인해 5000여 주민이 죽었고 부상자는 3000여 명이었다. 사망자 가운데 4000여 명이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남성들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신의주 14개 중등학교 가운데 12개가 소이탄에 의해 파괴됐다. 국제협정에 따라 커다란 적십자를 표시해 두고 있던 2개의 시립병원도 전소되었다. 의사와 환자들은? 대부분은 죽지 않았을까.

전략폭격의 창시자라고 하는 이탈리아의 줄리오 두에(Giulio Douhet)가 했다는 악마의 궤변이 그대로 현실로 구현됐다. 그는 "인류 전체 경제에서 최대의 개별 가치를 지닌 건장한 청년(전방의 군인)을 보호하기 위해 후방의 여성, 노인, 어린이의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며 적군의 후방에 대한 전략폭격을 옹호했었다.

폭격 후 불 끄러 나온 주민 향해 기총소사
 <폭격> 표지. (김태우, 창비)
ⓒ 창비
<폭격>의 저자가 이날을 운명의 날이라고 부른 것은 이게 초토화 폭격의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11월 한 달의 폭격 리스트를 보면 싹쓸이란 말이 적확할 것이다. 11월 4일 청진, 5일 강계, 8일 신의주에 이어 9일 삭주·북청·청진, 10일 청진· 의주, 12일 북청·만포진·선천, 13일 삭주·신의주·나남·초산·남시, 14일 신의주·나남, 15일 회령, 19일 무평리·구읍동·나남·관산·구성·별하리 표동, 20일 나남, 22일 무산, 23일 강계·삭주·구성, 24일 남시·장전하구·운산·신창·태천·구성·희천·강계 만포진, 25일 장전하구·만포진, 11월 26일 보급품 집적소, 27일 적 점령 도시, 28일 적 점령 도시, 29일 적 점령 도시, 30일 적 점령 도시...

폭격 다음 날에는 정찰기가 출동해 폭격지역을 사진으로 촬영해 결과를 평가했다. 도시별로 파괴율도 계산했다. 만포진 95%, 고인동 90%, 삭주 75%, 초산 85%, 신의주 60%, 강계75%, 희천 75%, 남시 90%, 의주 20%, 회령 90%... 당시 전선의 북쪽 곧 북한의 후방 지역은 전부 폭격으로 파괴된 것이다.

소이탄의 위력은 이미 일본 폭격에서 증명된 바가 있다. 일본에 투하된 소이탄은 목조건물을 불태우는 데 특화된 M-69였으나 북한에 투하된 M-76은 달랐다. M-76 소이탄은 마그네슘과 원유의 화합물로 만들어졌다. 불타는 마그네슘은 강철을 녹이는 1980℃까지 온도가 급상승하기 때문에 차량 열차 철로 공장 등을 파괴하는 데 유용한 무기였다. 마그네슘은 폭발성 있는 가스를 형성시켜 인체에 유해한 연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화재 발생 후의 진화활동을 저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소이탄이 만들어낸 화염이 오래 지속되도록 별도의 조치들도 취했다. 화재를 진화하기 위해 나온 주민들을 향해 전폭기들이 저공비행을 하며 기총소사로 퍼부은 것이다. 소이탄 투하 직후에 시한폭탄을 투하한 것도 같은 의도였다. 이 때문에 소이탄의 화염은 며칠이든 계속되곤 했다. 화재진화나 교량복구에는 민간인이 동원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들을 대상으로 한 기총소사와 시한폭탄... 잔인한 전쟁폭력일까, 영특한 무력일까.

11월의 압도적인 폭격에도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후퇴할수록 폭격지역도 남쪽으로 확대됐다. 12월 말 유엔군이 38선 이남으로 철수하자 초토화 폭격은 38선 부근까지 확대됐다. 12월 28일 출격한 폭격기들은 파주시 금천, 황해도 서흥군 신막읍,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 등에 대량 집중폭격을 가했다.

1951년 1월 3일과 5일의 폭격은 북한의 수도 평양을 이틀 만에 완벽한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평양 이외에도 원산 함흥 흥남 등 북한의 대도시는 불붙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런 폭격은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이르는 순간까지 계속됐다. 폭격의 위험에 노출된 이들에게 전쟁의 운명이란 말은 너무 안이하다는 느낌이다. 폭격은 하늘에서 내려온 무엇일까.

전폭기들은 폭격기 호위 임무 이외에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중폭격기가 목표로 삼지 않는 북한의 작은 마을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물론 적군이 점령하고 있고 아니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농촌지역의 작은 마을, 심지어 산간의 고립된 가옥들까지 모두 폭격의 대상이 됐다.

특기할 것은 폭격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대개 "남은 무기를 소진했다"였다. 전폭기든 폭격기든 임무를 수행한 다음 귀대하면서 지상의 전선을 남하하기 전에 남은 싣고온 무기를 소진해 눈에 보이는 임의의 마을을 임의로 폭격한 것이다. 기체의 중량을 감소시켜 기지까지 돌아가는 휘발유를 절약한 것일까, 아니면 충실하게 폭격을 연습한 것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긴장감은 넘치지만 자신은 절대로 죽거나 다칠 일이 없는, 컴퓨터 게임과 다를 바 없는 신나는 폭격놀이였을까.

폭격의 결과는 파괴와 살상만이 아니었다. 도시와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공습을 겪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던 공간과 지역에서 떠나야 했다. 하나는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가게 했다. 민간인은 가옥이 이미 파괴됐고 공습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어 허름하지만 토굴이라도 파야 했다. 토굴은 임시방편으로나마 은폐와 엄폐가 어느 정도는 가능한 생존공간이 되기도 했다. 중국군과 인민군은 전술적인 지하갱도를 판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른 하나는 살던 지역을 아예 떠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북한은 뒤숭숭한 전쟁통이긴 했어도 민간인의 피난이 물결을 이루지는 않았다. 그러나 폭격 이후에는 오로지 생존 그 자체를 위한 대량의 피난민이 발생했다. 각자의 정치적인 선택 이전에 오직 생존을 위한 피난이었다.

한 학자는, 전쟁 초기 서울 경기 지역에서 피난한 민간인들을 1차 피난으로, 광범위한 북한 지역에서 미공군의 폭격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한 것을 2차 피난으로 구분했다. 1차 피난은 정치적 피난의 성격이 강했지만, 2차는 당장의 폭격과 훗날의 처벌을 회피하기 위한 생존을 위한 피난으로 분석했다. 자유를 찾아 남으로 또는 폭격을 피해 남으로,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인 것이었을까. 내가 알아온 한국전쟁에서 남으로는 자유를 찾아서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적국의 민간인은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것인가
 1950. 8. 19. 미 공군 B-29 폭격기가 청진의 공장지대를 맹렬히 폭격하고 있다.
ⓒ NARA
폭격과 피해자 통계를 보면 한국전쟁이 민간인에게 얼마나 잔인한 전쟁이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 본토에 16만 톤을, 일본군 전체를 대상으로는 총 50만 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그런데 고작 5년 뒤에 신생국 북한에는 63.5만 톤을 투하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포함해 미공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33만~90만 명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그런데 미 공군의 화염 폭격으로 사망한 북한의 민간인은 99.5만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일본은 720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1.3%인 90여 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50년 당시 북한 전체 인구는 970만 명이었고 인구의 10% 넘는 인구가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몇 가지 스스로 물어본다. 김일성 정권이 전면전을 일으킨 것 자체가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범죄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모든 주민은 재판이든 경고든 아무런 절차나 배려도 없이 죽여야 하고, 그렇게 죽어도 마땅한 생명들이었나. 만일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적국이라고 규정하는 국가의 민간인들을 또 그렇게 죽일 것인가. 그렇게 죽인 만큼 우리 국민도, 아니 나 자신이 그렇게 죽는다고 해도 '전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퉁 치고 말 것인가.

아무리 전쟁이라 해도 범죄는 범죄다. 민간인 학살과 포로학대, 악마의 무기 등이 그렇다. 적어도 야만이 아닌 문명이라고 말한다면 더욱 그렇다. 앞으로 어떤 전쟁이든 전쟁이 벌어지면, 우리는 또는 우리 편이나 진영은, 민간인과 민간인들의 모든 것까지 깡그리 파괴하는 폭격을 작전명령으로 성안하고, 실행하고, 지지하고, 작전이 성공했다고 박수를 칠 것인가.
덧붙이는 이야기
그것은 한 권의 책이었다. 한국전쟁 참고도서 리스트를 훑어보는데 '폭격'이란 두 글자 한 단어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바로 온라인 책방에 주문을 했다. 다음 날 오전에 배송된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손끝에 느껴지는 두툼하고 묵직한 것에 흠칫 놀랐다. 서둘러 책을 꺼내는 바로 그 순간 충격이었다.

하얀 바탕에 짙은 검정과 어두운 빨강으로 그려진 폭격기가 땅바닥을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듯 배치되어 있었다. 우측 상단에는 큼직하고 새까만, 획이 두꺼운 고딕체의 '폭격'이란 두 글자가, 그야말로 땅에 박힌 불발탄처럼 두툼한 하드 커버 표지에 박혀 있었다. 비행기를 몰고 가서 공중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단순해 보이는 행위에 대해 484쪽이나 되는 연구서를 냈다는 것 자체도 충격이었다. 책의 부제도 그랬다. 내가 아는 폭격이란 고작해야 피해자 증언의 집적 정도라고 넘겨짚었는데, 그게 아니라 폭탄을 퍼부은 미 공군의 폭격 기록 10만 쪽을 뒤지고 분해해서 추출해 낸 연구결과라니.

급한 마음에 목차부터 훑어보고 바로 머리말을 읽어갔다. 그러고는 폭격의 전쟁사에 집적된,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국가폭력 또는 군사력으로서의 공중폭격에 대한 인간들의 지독하고도 잔인하고 비열한 열망을 읽어가면서 충격은 계속됐다. 내게 축적된 충격이 남긴 것은 절망감 비슷한 것이었다. 상대방이 만만해 보이면 자기 힘으로 마구 제압하려 들지만, 자기를 압도하는 힘이 나타나면 그의 하수인이 되어 열렬히 숭배한다는, 인간에 대한 절망감이다. 특히나 권력에 가까운 인간일수록 이런 위험한 힘을 숭배하며 집착한다는 생각이 가슴을 누르곤 했다.

역사학자가 쓴 학술서나 교양서는 지루하더라도 나름 흥미롭게 읽는 것은 나의 일상이지만 책에 대한 소감을 충격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금도 나는 이 책을 보면 폭격이란 제목이 충격으로 읽히곤 한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은 한 번에 완독하지 못하고 일 년 넘게 방치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내 머릿속에서는 폭격과 충격이라는 어휘가 맴돌고 있었다. 건드리고 싶지 않은 판도라의 책이랄까. 이제 휴전협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짤막하게라도 정리하기로 마음 단단히 먹고 책을 다시 펼친 것이다.
* 필자의 사정으로 12월까지 연재를 쉬어 갑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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