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멍·강멍·논멍의 즐거움..작가 김탁환 인생을 바꾼 '곡성 밥상'

곡성은 잘 몰랐다. 전북 남원과 전남 구례 사이에 있어 여행기자도 늘 지나치는 고장이었다. 남원이 가까워 전라북도에 속하는 줄 아는 사람도 많다. 곡성군은 전라남도에 있다. 곡성(谷城)이란 이름이 계곡이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니 산도 많을 터이나, 지리산 자락이 너머에 있어 산행을 좋아해도 쉬 발길이 닿지 않았다. 섬진강이 곡성을 가로지르지만, 섬진강 하류의 구례나 하동, 광양처럼 강물이 바로 연상되지도 않는다. 이런 경우 여행기자는 흔히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연두와 초록이 교차하는 계절, 곡성으로 내려갔다. 섬진강 신록이 궁금해서만은 아니었다. 한 소설가가 거기 낡은 폐교 건물로 거처를 옮겼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김탁환(54). 문단이 참여문학이 어쩌고 순수문학이 어쩌고 떠들던 시절, 이야기의 힘을 믿고 묵묵히 역사소설의 길을 걸었던 작가다. 시류에 맡겼다면 지금쯤 SF 작가가 됐을 법한 그가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내려가 벼농사를 짓고 글 쓰며 산다는 소식에 궁금증이 일었다. 4월 28일 곡성에서 농부가 된 과학자와 농부를 꿈꾸는 소설가를 만나 이틀을 걸었다. 둘째 날 아침 봄비가 내렸다. 흙내가 확 끼쳤다.
발아의 시간

서울의 소설가가 곡성의 농부 과학자를 알게 된 건 2018년 3월 1일이다. 장편소설 집필을 마치고 지리산에 내려와 바람 쐬고 올라가는 길, 전라도에 사는 친구가 미실란에서 운영하는 식당을 예약했다. ‘밥cafe飯(반)하다’. 그곳에서의 밥 한 끼가 작가의 인생을 바꿨다. 훗날 작가는 “그날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만났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날의 밥상이 분수령이 된 건 분명하다. 그즈음 비건(Vegan·적극적 채식주의자)을 선언한 작가는 고기는커녕 젓갈도 안 들어간 미실란 밥상에 감동했다. 발아현미로 지은 밥과 동네에서 거둔 채소 반찬만으로 차린 유기농 채식밥상이었다. 이날 이후 소설가는 뻔질나게 미실란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2020년 8월 소설가가 미실란을 알아가는 과정을 적은 에세이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를 펴냈다.


2021년 1월. 소설가는 곡성으로 아예 터전을 옮겼다. 1주일에 닷새는 곡성에서 살고 주말은 서울 집에서 보낸다. 요즘 유행한다는 ‘5도2촌(5都2村)’이 아니라 ‘5촌2도’ 생활이다. 곡성에서는 아침에 미실란에 출근해 오전에는 2층 집필실에서 글 쓰고 오후에는 이동현 대표와 논에 나가는 일상을 반복한다. ‘올해 심은 식물들. 벼(630개 품종), 해바라기, 배추, 국화, 바질, 상추, 가지, 곰취 등’. 지난달 출간한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2021년 11월 9일자에서 인용했다. 이날 일기만 보면 영락없는 농부의 일기다.


지난해 12월 18일에는 미실란 건물 옛 교무실 자리에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을 열었다. 주로 생태 관련 책 500종을 들였는데, 책 300종의 소개 글을 작가가 일일이 써 걸어놨다. 책방 구석에선 1g 단위로 쌀도 판다. 책과 쌀을 나란히 파는 가게라니. 김탁환은 “이야기학교를 열어 동네 주민에 글쓰기도 가르친다”며 “이동현 대표와 문화생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4월 30일에는 미실란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렸다. 벌써 26번째 음악회란다.
걷다가 눕다




습지에 자동차는 못 다니는 철제 다리가 있다. 다리 철판에 구멍을 퐁퐁 내 ‘퐁퐁 다리’다. 두 남자는 ‘뿅뿅 다리’라고 따로 부른다. 강물이 불면 구멍을 통해 물이 올라오는데, 그때 뿅뿅 소리가 난단다. 다리 복판에서 한참 ‘강멍을 때리던’ 두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고 다리에 드러누웠다. 그들을 따라 나도 누웠다. 등을 타고 발랄한 물소리가 올라오더니 이내 온몸을 감쌌다. 그러고 보니 곡성에서 만난 농부 소설가와 농부 과학자는 길을 걷다 여차하면 누웠다. 곡성의 산과 강처럼 자연스러웠다.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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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군은 서울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분 거리다.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은 곡성 읍내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다. 곡성의 대표 관광명소인 섬진강 기차마을과도 가깝다. 미실란 ‘밥cafe 飯(반)하다’의 대표 메뉴인 ‘발아오색 낭만세트’는 100% 유기농 비건 식단이다(1인 1만5000원, 2인 이상 주문). 고기 반찬은커녕 생선 한 토막 안 올라온다. 흑미로 만든 죽과 누룽지 샐러드, 두부 지짐, 토란을 넣은 궁중 떡볶이 등이 반찬으로 나온다. 여느 고기 밥상보다 풍성하고 맛있다. 보통 이 밥상에 토란표고탕수(2만원)를 추가해 먹는단다. 김탁환은 조만간 평소 산책 나서는 길을 함께 걷는 ‘걷기 학교’를 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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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글ㆍ사진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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