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도 계급장 뗀다..직급 파괴의 경영학

명순영, 노승욱 2022. 1. 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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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주임-대리-과장-차장-부장-상무-전무-부사장-사장.

그간 기업 인사관리(HR)의 근간을 이뤘던 직급을 파괴(통합)하는 움직임이 최근 재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6개 직급을 하나로 통합하는가 하면, 직급마다 3~5년씩 주어졌던 승진 연한을 폐지하는 기업도 잇따른다. 삼성전자는 2021년 11월 ‘미래지향 인사 제도’ 혁신안을 발표했다. 부사장과 전무 직급을 ‘부사장’으로 통합하고, 승진 연한인 ‘직급별 표준 체류 기간’을 폐지한 것이 골자다. 직급과 연공서열을 중시하던 기존 인사 제도에서 탈피, 능력만 있다면 30대 임원, 40대 최고경영자(CEO)도 배출하겠다는 취지다.

기업 인사관리(HR)의 근간을 이뤘던 직급을 파괴(통합)하는 움직임이 재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다. 사진은 2021년 11월 ‘미래지향 인사 제도’ 혁신안을 발표한 삼성전자 서초사옥의 직원들 모습. (김호영 기자)

▶재계는 지금 ‘직급·호칭 파괴’ 중

▷‘층층시하’ 줄이고 수평 문화 확산

CJ그룹은 더 파격적이다. 사장·총괄부사장·부사장·부사장대우·상무·상무대우 6개로 나뉘어 있던 임원 직급을 ‘경영리더’로 통일한다. 회장, 부회장을 제외한 모든 임원 직급이 통합되는 것이다.

롯데는 상무보A·B를 상무보 하나로, 부장(S1)과 차장(S2)도 ‘수석’으로 통합한다. 통상 S1이 3년, S2가 4년으로 임원에 오르기까지 최소 7년이 걸렸으나, 이번 직급 통합으로 빠르면 5년 차부터 임원 승진 대상이 된다. 이 밖에도 한화와 현대중공업은 상무보 직급을 폐지하고, 삼양식품은 사원~부장 직급을 매니저·팀장 2단계로 단순화한다.

현대차와 SK그룹은 이미 2019년부터 인사 제도 개편을 통해 임원 직급을 대폭 줄였다. 현대차는 이사대우와 이사, 상무 직급을 상무로 통합했고, SK는 사장 아래 임원을 모두 부사장으로 일원화했다. LG그룹은 2017년부터 직급을 ‘사원-선임-책임’으로 통합했다.

직급과 함께 호칭도 통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7년부터 직급 대신 ‘프로’로 부르도록 한 데 이어, 앞으로는 임직원 간 상호 높임말을 쓰도록 했다. 현대차는 사원과 대리는 ‘매니저’, 과장~부장은 ‘책임 매니저’로 호칭을 이원화했다. SK는 평사원 호칭은 매니저로 통일하고, 임원은 본부장·그룹장·실장 등 직책으로 부른다. LG경영연구원은 2022년부터 ‘○○ 님’으로 호칭을 단순화한다. 포스코ICT는 새해부터 사원~부장 호칭을 모두 ‘프로’로 통일하기로 했다.

평가와 보상 체계도 달라진다. 삼성전자는 기존의 상대평가 방식 대신,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불필요한 내부 경쟁을 줄이고, 성과만 잘 내면 누구나 상위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단, 절대평가는 최상위 평가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에 적용된다. 이 밖에 5년 이상 근무한 직원이 다른 부서로 이동할 수 있는 ‘사내 FA 제도’, 협업 기여도를 동료가 평가하는 ‘피어(Peer) 리뷰’, 우수 인력이 정년 이후에도 지속해서 근무할 수 있는 ‘시니어 트랙’도 도입했다.

현대차는 지난해 성과가 좋은 사무·연구직 간부 직원들을 선발해 500만원의 특별 포상금을 지급하는 ‘탤런트 리워드’ 제도를 도입했다. 노사 협상을 거쳐 전 직원에게 균일하게 성과급을 나눠 주던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개인 성과급을 강화한 것이다.

▶재계 직급 파괴 나선 이유는

▷직무 중심 조직 개편에 소통 강조

최근 직급 파괴에 적극적으로 나선 가장 큰 이유는 ‘위기감’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팬데믹, 급격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글로벌 시장 경쟁 격화를 겪으며 기업 내부 조직이 변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두려움이 배인 변화로 평가된다. 특히 ‘관리의 삼성’으로 불렸던 삼성전자의 조직 변화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전자가 직급 파괴에 나선 것은 5년 만이다. 과거 7단계 직급을 4단계로 줄이기는 했으나 임원 시스템에는 변화가 없었다. 삼성을 이끈 힘이 조직에 대한 충성도 높은 임원의 힘이라는 인식이 강해서다. 권오현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이 저서 ‘초격차’에서 밝힌 대로 지금까지는 우수한 ‘사람’을 키워 자리를 맡기는 전략이 먹혔다.

그러나 반도체·스마트폰 부문 등에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미국 출장 뒤 “격차 벌리기만으로는 거대 전환기를 헤쳐 나갈 수 없다”는 위기감을 피력했고 사업부문장 전원 교체라는 초강수 카드를 꺼내들었다. 동시에 부사장-전무를 통합시켜 신속한 의사 결정 구조를 만들었다. 기술과 지식의 융·복합이 경쟁력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상명하복식 관료주의로는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조치다. 구글이나 애플처럼 격의 없는 소통과 치열한 토론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삼성전자조차 직급 파괴가 절실했던 셈이다.

둘째, 직급보다 직무를 중시하는 문화가 직급 파괴를 이끌었다는 분석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속담이 있다. ‘급’이 주어지면 역량이 커지고 시야가 넓어져 역할을 다한다는 게 요지다. 한편, 누굴 앉혀도 크게 상관없이 잘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는데 이 같은 시선에 의문 부호가 붙기 시작했다.

유규창 한양대 경영대학장은 “적재적소(適材適所)가 아닌 적소적재(適所適材) 시대가 왔다”고 강조한다. 사람 중심 속인주의 인사관리 접근법이 아니라, 필요한 자리에 필요한 인재를 배치하는 직무 중심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그는 “속인주의 인사관리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봐야 한다. 이제는 깊은 전문성을 가진 인재들이 자발적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기업이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수적인 은행권에서조차 직무 중심 변화가 엿보인다. 하나금융그룹은 부회장이 정점이었던 실무 지휘 체제를 대폭 뜯어고쳤다. ‘부회장-총괄-부서’ 3단계에서 ‘총괄-부서’ 2단계로 단순화했다. 그간 하나금융은 ESG·글로벌·디지털 담당 부회장 3인이 6개 총괄 영역을 관할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개편되는 체제에서는 6개 총괄 영역이 부회장 휘하를 벗어나 독립된다. 직급과 상관없이 총괄임원이 최종 전결권을 갖고 실무 부서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지는 구조다.

셋째, MZ세대(198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밀레니얼세대와 Z세대)가 조직 중심으로 올라온 영향도 적지 않다. MZ세대는 평생직장 대신 합리적 보상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수평적 조직문화를 선호한다. 공정성 중시도 MZ세대를 대변하는 핵심 특징이다. 이런 특성을 가진 20·30대 젊은 직원이 서열 중심 한국 기업 문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기업은 창의적이고 유능한 MZ세대를 채용하고 관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직급 파괴에 나서고 있다. 특히 구성원이 대부분 MZ세대인 기업에서는 직급 파괴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카카오뱅크 임직원 83%는 40세 이하다. 카카오페이 임직원 중 MZ세대 비중은 90%다. 키카오에서 직급은 오로지 ‘팀장’과 ‘팀원’뿐이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위해 구성원들은 서로를 ‘브라이언’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부를 정도다.

아울러 최근 재계 오너십이 달라졌다는 점도 직급 파괴의 한 요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외국 유학파, 30~40대 IT 기업 총수 등장이 연공서열 파괴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직급 파괴에는 인사 적체와 고임금을 해소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직급을 단순화하면 연차가 쌓인 직원을 꼭 승진시켜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울러 승진에 따른 자연적인 연봉 상승효과를 재점검하는 기능이 있다.

▶직급 파괴는 만병통치약?

▷네이버 ‘임원제’ U턴…책임 경영 강조

직급·호칭 파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제기된다. 직급이 단순화되면 승진과 연봉 상승 기회가 줄어들고, 특정 직급에서 체류 기간이 길어져 경력 정체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경영에 책임을 지는 임원급을 통합하면 책임 소재가 모호해질 우려도 적잖다. 실제 네이버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직급을 A·P레벨 2단계로 줄이고 임원제도 폐지했지만, 이내 ‘책임 리더’를 도입하며 사실상 임원제를 부활시켰다. 카카오도 2021년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임원 직급을 도입했다. 사세가 급성장하며 분산된 각 업무 부문을 관장하고 책임질 ‘컨트롤타워’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물류 대기업 A사는 섣부른 직급 파괴로 회사가 곤혹을 치른 사례다. A사는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해소하고 유능한 직원의 빠른 승진 기회 제공을 위해 직급 파괴를 단행했다. 우선 부장-차장 직급을 통합해 운영하고, 개편된 직급 체계가 어느 정도 정착된 후 다른 직급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초기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제도 도입 후 3년이 지난 시점부터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신입 직원 채용이 더딘 상황에서 상위 직급을 통합한 결과, 부장 직급(기존 차장+부장) 인력이 전체의 47%를 차지하는 ‘역피라미드형’ 조직이 됐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에는 차장이 됐을 30대 후반에 부장이 되니, 임원이 되지 않는 한, 정년인 55세까지 15년 이상을 승진 없이 보내게 되는 ‘승진 적체’ ‘경력 정체’ 현상이 심화됐다.

특히 불만이 컸던 것은 보상 문제였다. 기존에는 차장에서 부장으로 승진하면 약 600만원 수준의 기본급 상승효과가 있었는데, 두 직급을 통합하면서 이런 연봉 상승이 사라지게 된 것.

결국 A사는 직급 체계를 다시 손질해야 했다. 먼저 경력 정체 해소를 위해 임원이 안 돼도 도달할 수 있는 조직 내 최고 전문가 계층(Guru, Master)을 신설했다. 보상의 형평성 문제는 개편 후 부장이 된 이들도 개편 전 부장급 급여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승진의 기준을 과거 ‘성과’가 아닌, 향후 상위 직급의 역할 수행을 위한 ‘역량 준비도’ 측면으로 크게 전환했다. A사가 겪은 시행착오는 최근 직급 축소·통합에 나서고 있는 기업들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문제다. 전문가들은 인사 제도 개편이 자칫 조직의 근간을 흔들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직급 체계는 인사 체계의 근간이다. 이를 자주 흔드는 접근은 시스템에 대한 불안정성을 야기한다. 구조적 혁신이 꼭 필요한 상황인지, 아니면 일부 핵심 인재를 중심으로 하는 일정한 변화만 시도해볼 문제인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인사 제도를 개편하는 목적과 큰 그림을 구성원들에게 명확히 공유해, 변화의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도 수반돼야 한다.”

방호진 제주대 경영학과 교수의 조언이다.

인터뷰 |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경영학 박사)

미래 50년 비즈니스 모델 위해 지금 조직 바꿔야

Q 재계 직급 파괴 흐름이 거세다.

A 최근 ICT 기술 중심으로 경영 환경이 빠르게 변한다. 초경쟁(Hypercompetition)에서 이기는 방법은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뿐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수평적·창의적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한국 기업도 직급 파괴라는 ‘극약처방’으로 위계적인 조직문화를 바꾸는 중이다.

Q 재계 직급 파괴 중 모범 사례가 있나.

A SK그룹이 빠르고 적극적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직급 단순화를 내세웠다. 조직문화에 대해 항상 고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최근 발탁 인사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SK하이닉스 사업총괄 사장에 1975년생을 앉혔다. 연공서열보다 성과와 능력에 맞게 인사하는 문화는 직급 파괴와 맥을 함께한다.

Q 직급 단순화 등은 2000년대 초반부터 거론됐다. 지금 더욱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A 4차 산업혁명 시대 새 기술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훨씬 중요해졌다. 2000년대까지는 기존 세대가 만들었던 비즈니스 모델이 먹혔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향후 50년을 내다본다면 변화가 절실할 수밖에 없다. 구글이 왜 돈 안 되는 신규 사업에 대규모로 투자를 할까. 기존 모델로는 한계가 있어서다. 국내 기업도 새로운 성장 기반을 마련해야 하고 조직 개편은 그 핵심 변화 중 하나다.

Q 직급 파괴 때 주의할 점은 뭔가.

A 과거에는 ‘직급 = 연공 = 숙련도’라는 공식이 성립했다. 지금 이 같은 숙련도는 의미가 없어졌다. 따라서 직급도 중요하지 않다. 직급 공백을 대체하는 것은 ‘기술’이기 때문에 인재 관리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리스킬(Reskiilling)과 업스킬(Upskiilling) = 커리어 성장 = 보상’ 구조가 필요하다. 전통 직급의 폐해를 알지만 안정적인 시스템을 깨는 것에 대해 불편해할 수 있다. 직급을 없애는 것으로 조직에 ‘모호함’을 양산하는 방식보다 본인이 성장하고 성과를 내면 어떤 보상을 받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MZ세대가 조직에 편안함을 느낀다.

[명순영 기자, 노승욱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41호 (2022.01.05~2021.01.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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