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전 20주년 인터뷰] 설기현의 2002년 비화 "연습복 입고 뛸 정도로 긴장했죠"

조효종 기자 2022. 6. 17.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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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 경남FC 감독. 조효종 기자

[풋볼리스트] 조효종 기자= 2002년 6월 18일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은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힌다. 패배하면 탈락하는 토너먼트 경기에서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6위, 우승후보 이탈리아를 상대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가 승부를 뒤집었다.


안정환의 골든골은 설기현의 동점골이 먼저 터졌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사실 전반 3분 설기현이 페널티킥을 얻어내며 쉽게 풀 수 있는 경기였는데, 안정환이 실축하면서 역대급 역전극이 시작됐다. 크리스티안 비에리에게 선제골을 내주고 끌려가던 후반 43분 동점골을 넣어 팀의 패배를 막고 경기를 골든골이 나올 상황으로 이끈 선수도 설기현이었다.


'풋볼리스트'는 한일 월드컵 20주년을 맞아 경남FC 감독을 맡고 있는 설기현을 만나 당시 월드컵 이야기를 물었다. 이탈리아전이 이미 네 번째 경기였고 설기현의 경기력도 좋았으니 침착하게 경기에 임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답은 정반대였다.


2002 월드컵이 20주년을 맞았다. 당시 대회는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나


20년이나 지났다고 하니 생각보다 더 오래전 일 같은 느낌이다. 2002 월드컵은 처음으로 출전한 월드컵이었다. 월드컵은 선수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대회다. 어렸을 때 월드컵을 보고 '세계의 벽은 진짜 높구나'라는 걸 느꼈다. 월드컵 출전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2002 월드컵 대표팀에 선발됐다. 게다가 홈에서 하는 대회였다. 내가 아는 월드컵은 외국에서 하는 거고, 새벽에 봐야 하는 거였는데…(웃음)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매 순간이 특별했겠지만 한 경기를 꼽자면 이탈리아전일까?


골을 넣었으니까 의미가 남다른 경기이긴 했다. 그런데 첫 경기였던 폴란드전 또한 기억에 남는다. 기대도 했지만 걱정과 긴장을 많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워밍업할 때 입었던 하의를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경기에 나설 정도였다. 너무 긴장을 해서 상의 유니폼만 갈아입었던 거다. 하의는 디자인이 똑같으니까 의식을 못했는데 연습복이라 나만 번호가 없었다. 그만큼 긴장했던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 역사상 월드컵 첫 승을 거뒀다. 부산아시아드경기장, 그 큰 경기장에서 빨간색 응원복을 입은 수만 명의 관중들의 응원을 받았던 것이 생생하다.


첫 승을 넘어 무려 4강 신화를 이뤄냈다. 예상할 수 있었나


월드컵을 앞두고 제주에서 잉글랜드와 평가전을 해서 1-1로 비겼다. '이 친구들이 몸이 안 좋나? 비행기를 너무 오래 탔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프랑스전도 할만 하더라. 그래서 '아 큰 대회 앞두고 7~80%로 뛰면서 관리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실력이 좋아졌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사실 (거스) 히딩크 감독님이 세계를 놀라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당황했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감독님이야 가시면 그만이지만 남은 우리는 곤란해지니까. 그럴 정도로 우리가 발전했다는 걸 몰랐다. 경기를 할수록 자신감이 생겼다. 상대는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계속 강한 데 그런 팀들을 연달아 꺾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느꼈다.


강해진 비결이 있었나


월드컵 1년 전에는 프랑스, 체코에 0-5로 졌다. 수준 차이를 체감했다. 특히 프랑스와의 컨페더레이션스컵 경기 풀타임을 뛰었는데 그 90분이 지옥 같았다. 공은 못 잡고 엄청 뛰어다니기만 했다. 다리가 너무 아프고 힘들더라. 이후 준비를 잘했다. 히딩크 감독님은 유럽 국가들의 특징을 잘 알고 계시는 데다가 우리의 강점과 약점도 정확히 파악하셨다. 우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고, 상대의 어떤 점을 공략해야 하는지를 알고 준비시키셨다. 예를 들어 히딩크 감독님이 한국 선수들은 체력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처음엔 전혀 이해를 하지 못 했다. 나는 그때 벨기에에서 뛰고 있었는데 팀에서 체력운동을 하면 항상 내가 1등이었다. 유럽은 한국만큼 운동을 많이 시키지 않더라. 공 좀 차려고 하면 훈련이 끝났다. 그런데 결국 히딩크 감독님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불필요한 운동량이 많았던 거였다. 경기에서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할 체력이 부족했다.


월드컵 4강 진출은 유럽 무대에서 경쟁하는 데 엄청난 힘이 됐을 것 같다. 2002년 발롱도르 후보에도 올랐는데


맞다. 당시 벨기에 구단 안더를레흐트에서 뛰었는데 이적 첫 시즌에는 적응을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월드컵을 치르고 복귀하니까 리그 경기가 쉽게 느껴지더라. 현지 언론들이 당시 감독님에게 '월드컵 이후 '설'이 뭐가 달라진 거냐'고 묻기도 했다. 감독님은 모르겠다고 하셨다(웃음).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것 같은데 다른 선수가 돼있었다. 월드컵에서 세계적인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섰기 때문에 계속 그 선수들을 상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동료들의 반응은 어땠나) 나를 대하는 자세가 많이 달라졌다(웃음). 말도 잘 안 통하고 축구도 못했던 애가 갑자기 잘하니까 좋아했다. 유럽은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선수들이나 팬들이나 축구를 잘하면 그만큼 인정을 해준다. 덕분에 즐겁게 축구했다.


2002 월드컵 세대로서 가지는 사명감이 있을 것 같다


다른 멤버들고 그렇고 나도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 월드컵 당시뿐 아니라 이후에도 월드컵 덕분에 유럽에서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경험했던 것들을 여러 위치에서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독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축구를 시도하는 것도 그런 책임감이 있기 때문이다.


설기현 감독(경남FC). 서형권 기자

감독이 된 지금 당시 선수 설기현을 평가해 본다면?


많이 부족했다. 지금은 우리가 매주 실시간으로 경기를 볼 수 있으니까 유럽 축구가 가깝게 느껴지만 당시에는 전혀 그런 환경이 아니었다. 월드컵 전까지만 해도 유럽 진출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굉장히 좋은 기회가 와서 벨기에에 진출하긴 했지만 아무 정보가 없는 채로 갔다. 미리 벨기에 축구, 유럽 축구에 대해 알았다면 훨씬 더 빠르게 적응하고 경기를 즐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뭐든지 직접 부딪혀서 경험을 쌓았다.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소극적이었다. 그 시기를 모두 경험하고 난 지금 보면 당시 나는 굉장히 부족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후회되는 선택은 없었나


선수는 매 시즌이 끝나면 거취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중 벨기에에서 잉글랜드 무대로 넘어간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당시 챔피언십(2부) 소속이긴 했지만 울버햄턴에 입단하면서 새로운 축구를 경험할 수 있었다. 어려웠던 적응기를 지나니까 영국 축구만의 매력이 있더라. 레딩에 있을 때도 좋았다. 레딩 축구가 굉장히 재미있었다. 후회까지는 아니지만 그때 레딩에서 조금 더 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은 있다. 풀럼에 가서 적응을 잘 못하기도 했고(웃음). 레딩에서 축구를 재밌게 했었으니까.


잉글랜드 무대를 누비고 있는 후배들의 활약을 보면 어떤가.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황희찬은 울버햄턴에 입단해 직속 후배가 됐다


손흥민 선수는 탑클래스다. 그 이상 수식어가 필요 없다. 황희찬 선수가 울버햄턴으로 이적하면서 당시 알고 지내던 팬을 통해 연락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선수가 울브스 유니폼을 입고 뛰는 걸 보니 좋다.


이제 2022 월드컵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월드컵 성적은 리그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K리그 구단 감독으로서 대표팀이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좋겠다. 또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예년과 다르게 예선을 손쉽게 통과하기도 했고 (파울루) 벤투 감독님께서 오랜 기간 팀을 맡으면서 팀 완성도도 올라갔다. 세계적인 선수가 된 손흥민 선수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도 잘해주고 있다.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할 텐데 좋은 성과를 내서 분위기가 리그까지 이어졌으면 좋겠다.


대표팀이 월드컵을 앞두고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


우리 팀 문제가 수두룩해서 다른 팀을 평가하긴 어려운데(웃음). 대표팀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선 손흥민 선수의 컨디션이 중요할 것 같다. 한 선수의 활약을 통해 주위에 있는 선수들이 자신감을 얻을 수 있고 팀 전체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다. 손흥민 선수가 해결사 역할을 해주면 경기를 쉽게 풀어나갈 수도 있다. 비중이 크다 보니 부담도 느끼겠지만 다음 시즌 준비 잘해서 지난 시즌과 같은 컨디션으로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월드컵을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조언 혹은 응원을 해준다면?


다들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니까 특별히 조언할 건 없다. 2002 월드컵이 끝나고 많은 팬들이 K리그 경기장을 찾아주셨던 기억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감독으로서 욕심이 난다. 이번에도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으면 한다. 좋은 성과 거두길 응원하겠다.


※설기현 경남FC 감독 인터뷰는 풋볼리스트의 한일 월드컵 20주년 기념 시리즈 '2002+20=2022'의 일환입니다. 당시 멤버였던 현영민, 이영표, 설기현, 김태영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사진= 풋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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