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그랜저 XG '수동', 낭만이 가득하다


때는 초등학교 소풍날이었다. 황금빛 대형 세단이 내 앞에 멈춰 섰고, 곧 같은 반 친구가 뒷좌석에서 내렸다. 나는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창틀 없이 열리는 멋들어진 문짝을 보고 넋을 놔 버렸으니까. 그렇게 현대 그랜저XG는 어릴 적 내 드림카로 자리 잡았다.

창틀이 없는 프레임리스 도어로 남다른 매력을 뽐냈다

창틀이 없는 프레임리스 도어 세단이라니. 오늘날 그랜저는커녕 제네시스 G70에서도 볼 수 없는 역동적인 스타일이다. 이토록 그랜저XG는 도전적이었다. 등장 배경부터 그랬다. 우리 손으로 빚어낸 최초의 독자개발 대형 세단이었다.

본격적인 수출길을 열었던 현대 쏘나타(Y2) / 우리나라 첫 순수 독자개발 승용차 엑센트

1990년대, 현대자동차는 국내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한창 열 올리고 있었다. 제법 성공적이었다. 먼저 판매한 엑셀과 쏘나타는 저렴한 가격으로 주목받았고, 첫 순수 독자개발 승용차인 액센트와 아반떼는 해외 시장에서 좋은 품질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한계가 분명했다. 경쟁 모델 대비 저렴한 가격과 소형차 위주의 라인업 때문에 소비자 사이에서는 ‘현대차 = 값싼 차’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브랜드 이미지를 뒤바꿀 고유 고급 세단이 필요했다.


1995년, 현대차는 그 꿈을 안고 ‘최고의 영광(eXtra Glory)’이라는 거창한 뜻을 담은 XG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첫 대형 세단인 만큼 더 높은 품질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EF쏘나타와 공유하는 차체는 부위별 결합 강도를 높였고, 보강재를 적소에 더했다. 공들여 완성한 자체 기술도 아낌없이 담았다. 10년 6개월간 55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멀티링크 서스펜션을 뒷바퀴에 쓰고, 보닛 아래엔 대한민국 최초 독자 개발 V6 엔진 ‘델타’를 주력으로 얹는다.

1998년 10월, 3년 6개월의 시간과 4600억원을 투자한 XG 프로젝트는 마침내 그랜저XG로 결실을 맺는다. 그런데 이상했다. 본래 신차는 크기가 늘어나기 마련이나, 그랜저XG는 도리어 전체 길이가 이전 세대보다 115mm나 줄었다. 스타일 역시 보수적이었던 이전보다 훨씬 젊었다.

쇼퍼드리븐 대형 세단이었던 2세대 그랜저

본디 XG 프로젝트가 준대형 세단 마르샤 후속을 겨냥했던 까닭이다. 그러나 마르샤는 시장에서 외면받고 그랜저는 다이너스티 등장으로 위상이 달라지면서, XG 프로젝트는 중간에 급선회해 그랜저 후속으로 방향을 튼다. 오너드리븐 준대형 세단이 쇼퍼드리븐 대형 세단의 이름을 이어받은 셈이다. 대신 전자제어 서스펜션과 함께 국산차 최초로 자연광 헤드램프(HID)와 5단 자동변속기를 얹으면서 그랜저 명성에 걸맞은 화려한 장비를 꾸렸다.


묘수였다. 한결 만만한 준대형 세단에 과거 국내 최고 세단이었던 그랜저 이름이 붙자, 그 명성을 소유하려는 고객이 줄을 이었다. 1997년 발발한 IMF 외환위기조차 아랑곳없었다. 도리어 비교적 저렴하게 만날 수 있는 고급차로서 지나치게 거대했던 경쟁 모델 사이에서 경기 불황을 날개 삼아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등장과 함께 대형 세단 시장 판매 독보적인 1위는 당연했다.

수출형 그랜저 XG는 상징적인 후드톱 엠블럼이 없다

출시 당시 현대차는 국내 3만대, 수출 1만대를 합쳐 연간 4만대 판매를 목표 삼았다. 겸손한 목표였다. 출시 이듬해인 1999년 그랜저XG는 국내에서만 3만 4291대가 팔려나갔다. 2000년엔 미국 수출을 시작하면서 국내 4만3869대, 수출 1만7872대를 기록해 총 6만2934대를 판매했다. 심지어 2002년엔 국내 6만691대, 수출 2만876대로 총 8만1569대를 출고해 역대 최다 판매 기록을 세운다. 처음 판매 목표의 두 배를 뛰어넘는다.

후기형 그랜저 XG

1998년부터 2005년까지, 그랜저는 7년간 누적 42만4974대 생산고를 올렸다. 국내 고급 세단으로서는 최초로 40만대를 넘어섰다. 이중 수출 판매량은 11만4760대. 그랜저XG는 해외에선 브랜드 이미지를 견인했고 국내에선 준대형 세단 시장을 활짝 열었다. 또 역대 그랜저 시리즈 중 유일하게 7년 동안 판매한 장수 세대이기도 하다.

시승차는 V6 2.0L 엔진을 얹은 엔트리 모델 2001년식 'Q20'이다

이름 그대로 ‘최고의 영광’을 구가했던 그랜저XG. 오늘날 다시 마주하면 어떤 모습일까? 등장 후 23년이나 지났건만, 세월이 무색하다. 여전히 멋스럽다. 기교를 억제한 단정한 스타일과 입체적인 굴곡이 자연스레 어우러졌다. 가령 B필러를 가려 옆 유리창을 하나처럼 이은 스타일은 말끔하고, 보닛부터 테일램프 끝까지 이어지는 두툼한 어깨선은 과감하다. 마무리는 그릴과 옆구리, 그리고 문손잡이까지 듬뿍 두른 크롬 장식이다. 세간에서 역대 가장 멋진 그랜저라고 칭송할 만하다.

프레임리스 도어와 플래그 타입 사이드미러가 클래식카 분위기를 풍긴다

문 열면 더 남다르다. 어릴 적 내 마음을 홀랑 빼앗았던 프레임리스 도어가 특별한 차를 타는 기분을 돋운다. 운전석에 앉아 두꺼운 문짝 윗면을 쥐고 닫으면 1950년대 클래식카에 앉은 착각에 빠질 정도다. 동시대 다른 자동차와 비교했을 때 문짝 두께도 두꺼워 든든하다.

실내는 교과서처럼 단정한 레이아웃에 장미목 무늬로 화사하게 분위기를 띄웠다. 주요 포인트는 문짝에서부터 대시보드까지 가로로 이어놓은 장미목 무늬 장식. 밖에서 봤던 과감한 어깨선처럼 윗면을 안쪽으로 꺾어 넣어 입체적일 뿐 아니라, 문짝 뒤까지 이어지면서 실내 너비가 더 넓어 보이는 착시 효과를 노렸다. 다만 눈으로 보기는 좋으나, 직접 만져보면 노골적인 플라스틱 질감이 아쉽다.

귀하디 귀한 수동변속기 모델이다

잠깐, 실내 사진을 봤다면 한가운데에서 시선이 멈칫했을 테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이 차는 귀하디 귀한 그랜저XG 수동변속기 모델이다. 마지막 국산 수동 대형 세단이자, V6 수동 세단의 마지막 계보를 장식한 의미 깊은 자동차다.

최고출력 134마력을 내는 V6 2.0L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 안쪽으로 파고든 더블위시본 서스펜션 마운트가 눈에 띈다

당장 시동을 걸었다. V형 6기통 엔진이 특유의 ‘오로롱’ 소리와 함께 깨어난다. 심장이 콩닥콩닥 뛴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6기통 엔진 + 수동 변속기 파워트레인 조합이란 말인가. 요즘 차와 비교하면 살짝 더 크게 움직이는 변속기 레버를 1단으로 밀어넣고 출발했다.


6기통 엔진 회전 질감이 발끝을 타고 생생히 다가온다. 자동변속기 먹먹한 토크컨버터를 거치지 않은, 클러치로 직접 이어진 날 것 그대로의 감각이다. 귀는 당연히 즐겁다. 물결 흐르듯 속 시원한 6기통 소리를 다음 기어를 맞물리며 싹둑 가를 땐 괜스레 오른발에 힘이 들어갈 만큼 전율이 돈다.

가속 페달 반응은 밟자마자 움찔거릴 정도로 빠르다. 클러치가 엔진과 바퀴를 직접 연결하는 까닭이다. 시승차는 최고출력 134마력을 내는 2.0L 델타 엔진을 얹은 Q20 모델. 분명 최고출력은 초라하다. 그러나 작은 엔진, 가벼운 수동변속기, 날씬한 차체 덕분에 공차중량이 단 1425kg에 그친다. 오늘날 1575kg(17인치 휠 기준)짜리 최신 4기통 2.5L 그랜저보다 150kg이 가볍다. 가벼운 무게와 동력 손실 없는 수동변속기가 어우러져 움직임이 가뿐했다.

굽잇길에서도 그랬다. 태생적으로 앞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앞바퀴굴림 6기통 대형 세단이지만, 알루미늄 블록 2.0L 엔진과 가벼운 수동변속기 조합으로 머리가 가벼워 앞뒤 무게 배분이 균형 잡혔다. 코너 안쪽으로 스티어링휠을 꺾어 넣으면 앞이 잽싸게 방향을 틀고 뒷바퀴가 든든히 버텨낸다. 대형 세단답지 않게 활기차다. 앞 더블위시본, 뒤 멀티링크를 조합한 우월한 구조도 한몫 단단히 했을 테다. 참고로 5세대 그랜저부터는 앞쪽에 구조적으로 더 단순한 맥퍼슨 스트럿 서스펜션을 쓰고 있다.


‘물침대 서스펜션’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승차감은 낭창낭창했다. 자잘한 노면 충격은 부드럽게 걸러내고 큰 충격은 출렁이며 소화한다. 그래도 대형 세단은 대형 세단인 모양이다. 고속으로 질주할 땐 신기하게도 묵직하게 가라앉으며 안정적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대 그랜저XG는 낭만적인 대형 세단이었다. 우아한 스타일과 창틀 없는 프레임리스 도어도 그렇지만, 2.0L 엔트리 모델까지 모두 6기통으로 빚고 앞쪽 서스펜션엔 오늘날 제네시스급에서나 볼 수 있는 더블위시본 서스펜션을 넣었다. 더군다나 시승차는 수동변속기를 얹어 운전 재미까지 빠짐없다. 디자인 기교를 잔뜩 부린 최신 세대보다 23년 전 그랜저가 더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글, 사진 윤지수


그랜저XG에 얽힌 시시콜콜 이야기


100억원 날려버린 ‘ㄴ’

“뒤를 좀 넓혀보지”라는 현대차 고위 경영자의 한 마디가 문제였다. 2002년 출시한 부분변경 모델은 그 말을 따라 ‘ㄴ’자 테일램프를 달았다. 깔끔하지 못한 모습에 소비자 불만이 쇄도했다. 미국판매법인은 수입까지 거부했다. 결국 100억원을 추가로 들여 다시 ‘ㅣ’자형 새 테일램프를 만든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XG는 2P 브레이크를 남겼다

그랜저XG는 브레이크 성능이 좋기로 유명했다. 여태까지 모든 그랜저를 통틀어 홀로 2P 디스크 브레이크를 사용한 덕분이다. 심지어 단종 이후에도 다음 세대 그랜저는 물론 투스카니 등 다른 자동차에 2P 브레이크를 옮겨 다는 튜닝이 유행했다.

부식만 없었더라면

도로 위 그랜저XG가 지나가면 뒤 펜더를 자세히 보자. 열에 아홉은 모두 뽀글뽀글 관통 부식이 진행 중이다. 파워트레인과 하체 등 전체적인 품질이 뛰어났는데도 그랜저XG가 도로 위에서 빠르게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다. 차체가 썩으면 답이 없다.